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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 파크 달리기

맨해튼이라는 사치

by Aragaya

뉴욕 비행기표를 끊고 숙소는 맨해튼 아파트로 정했다. 좀 덜 비싼 브루클린 숙소도 맘에 들었지만, 1주일 뉴욕 체류인데 아무렴 맨해튼이 낫다 싶었다. 벌이도 시원찮은 프리랜서 주제에 난 진정 욜로족이었던가! '다음 달부터 덜 먹고 덜 쓰면 되지 뭐.' 교통, 숙박비는 내가, 나머지 여행 경비는 남편이 낸다.

남편이 꼼꼼히 짠 일정대로 우리 가족은 매일 명소와 맛집을 탐방했다. 걷기 좋은 가을 맨해튼 거리는 어디선가 본 듯한 건물과 풍경으로 가득했다. 프렌즈, 섹스 앤 더 시티, 우디 앨런 영화들, 참 많기도 많지. 오전에 자연사 박물관에서 나비 정원을 체험하고 식사를 한 후 느긋하게 센트럴 파크를 걸었다. 흔하디 흔한 도심 공원인데 뭔가 운치 있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이려나? 내일 예약해 둔 구겐하임 뮤지엄이 보였다. 남편은 날이 화창하니 전시는 내일 보더라도 오늘 건물 사진을 찍어두겠다고 한다. 구겐하임의 부드러운 흰색 곡선과 쨍한 파랑 하늘 덕분에 아무렇게나 렌즈를 들이대도 고퀄 사진이 쏟아진다. 센트럴 파크를 벗어나려니 아쉽다. 갑자기 달리기 충동을 느낀다. '흠, 점심 먹은 지 아직 1시간 밖에 안 됐네. 그래도 지금, 여기, 너무 완벽하잖아! 난 뛰어야 해.' 남편과 아이에게 "나 딱 30분만 뛰고 올 테니까 근처 어디 카페에서 좀 쉬고 있을래?"라고 물었다. 운동할 때는 장비에 목숨 거는 남편은 내 옷을 쳐다본다. 빳빳한 칼라에 가슴, 허리선 따라 딱 붙는 블라우스, 스키니 진, 검은색 운동화 차림이다. "어휴, 다행히 신발은 운동화네?"라며 웃는다.


일단 셋이 같이 가장 가까운 카페를 찾아서 걷는다. 고즈넉한 어퍼 이스트 사이드다. 고풍스러운 아파트 현관마다 단정한 유니폼의 경비원이 서 있다. '부자 동네라 다르긴 달라.' 도심 한복판인데 놀랄 만치 조용하다. 남편과 딸은 예쁘장한 모퉁이 카페로 들어가고, 난 휴대폰 러닝 앱을 켠다.


한 손에 휴대폰을 거머쥐고 달리기 시작한다. 센트럴 파크 갓길로 뛴다. 공원 식수대가 보인다. '좋았어, 목마르면 여기서 마시면 되겠다.' 베를린에서 미국 동부로 여행 온 지 얼추 열흘 됐으니, 오랜만에 달린다. 길게 늘어뜨린 귀걸이가 걸리적거린다. 템포를 늦추면서 귀걸이 한 짝씩 빼내 바지 뒷주머니 깊숙이 넣는다. 어느새 두세 사람 겨우 지나칠 수 있는 오솔길로 뛰고 있다. 맞은편에서 살구색 브라탑에 갈색 레깅스 여성이

힘차게 뛰어온다. 운동꾼 몸매다. 양손에 아령을 들고 긴 생머리를 높이 묶었다. 내 옆을 훅 지나자 달콤한 냄새가 난다. '이건 1998년 유행했던 바디샾 바닐라 향수 같은데?' 후각이란 참 요물이다. 순간 스친 향기로 연도까지 끄집어내다니. 겨드랑이에 땀 차는 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꽉 끼는 블라우스가 불편하다. 다행히 속옷으로 브라 겸용 캐미숄을 입었으니 불편한 겉옷을 벗기로 한다. 러닝 앱 일시 정지를 누르기 귀찮아, 뛰는 속도만 살짝 줄이며 상의를 벗어 허리에 맨 후 다시 빠르게 뛴다. 오솔길에서 왼쪽으로 점프해 강둑에 오른다. 탁 트인 호수가 은빛으로 반짝이고 건너편 맨해튼 스카이라인은 우디 앨런 영화에서 수없이 본 바로 그 풍광이다. 달리기 복장도 아닌 데다 점심 먹은 지 1시간밖에 안 됐던지라 숨이 턱 밑까지 찼지만, 영화 속 마천루를 직관하며 호수 따라 뛰고 있으려니 여기가 천국인가 싶다.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둘까 잠시 생각했지만, 일단 내달리고 싶다. 멈추고 싶지 않다. 쨍한 가을볕, 허파로 훅 몰아치는 물기 머금은 찬 공기,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리는 기분 좋은 땀. 내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뉴욕 하이라이트다. 홀린 듯이 호수를 따라 뛰다가 아차 싶어 휴대폰을 확인한다. 30분 뛰고 오겠다고 했는데, 이미 편도 25분이 지나있다. 되돌아가려면 또 20여 분이 필요할 테니 아쉽지만, 다시 카페 쪽으로 방향을 튼다. 허리에 묵은 블라우스를 풀어 땀을 닦으며 공원을 나와 부자 동네로 들어선다. 투명 소음 차단막이라도 있는 듯이 주변은 갑자기 조용해지고, 나는 아까 본 기병대 같은 경비원을 지나치며 러닝 앱 '완료'를 누른다. 기록 7킬로,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저수지 조깅. '오, 평소보다 기록이 좋은걸?'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카페에 들어서자, 딸은 그림을 들어서 보여 주고 남편은 좋았냐고 묻는다. "어, 완전 기분 째지게 좋았어!" 딸이 남긴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화장실에서 목과 겨드랑이를 대충 닦고 나온다. 딸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사과 머핀을 먹었다고 자랑한다. 남편은 "그러게, 12달러짜리 미니 머핀이니 맛있었을 거야" 하며 웃는다. 맨해튼에서 가장 멋진 체험은 호수 뜀박질이었다는 걸, 내 뇌 장기 기억소에 저장해 둘 터이다.




윌리엄 케인, 이안 플레밍 따라 하기(사치, 대리만족, 감각 & 관능적 복장 디테일, 휴식과 즐거움 만끽, 이국적 장소)


(커버 이미지: Emily Kessler,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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