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일기
인스타그램(Instagram)이 화사하고 활기찬 공간이라면 텀블러(Tumblr)는 푸념과 자기 고백 많은 '비주류' 플랫폼입니다. 물론 일상을 올려 주위에(개인 설정에 따라 불특정 다수에게) 홍보하는 이미지 위주 SNS라는 공통점도 있죠. 나는 태생이 텀블러에 더 맞았습니다. 누군가의 다정하고 활기차고 이벤트 넘치는 삶을 구경하기보단 좌충우돌, 삑사리 투성인 현생 글이 더 와닿았으니까요. 표현의 자유에 목숨 건 반항아 플랫폼 텀블러는 특히 한국에서 성인물, 불법 콘텐츠 스팸의 온상이 돼 몇 차례 부침이 있었어요. 허지웅, 김중혁 작가처럼 스팸 때문에 텀블러를 떠난 유명인도 있고요(뇌피셜이지만요). 나는 의리를 지키며 정든 텀블러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경이로운 움짤, 즉 GIF만큼은 여기가 본진이라 보는 재미가 있거든요.
그런 나도 얼마 전 주류는 어떤 걸까 하고, 인스타 세계에 조심히 입문했어요. 모두가 질투하고 성토하던 인스타 말입니다. 허영과 과시의 최고봉이자 소녀들 자존감 하락 일등 공신이라는 그 인스타 말이죠. 낯선 인터페이스에 어리바리하며 조심스레 게시물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몇 안 되는 팔로워, 좋아요 수에도 불구하고 이 플랫폼은 일상에 금세 침투하더군요. 음, 남들은 저런 밥을 먹고 저런 행사에 가고 저런 책을 읽는구나. 호기심 반, 피식 웃음 반, 그래, 우린 인정 욕구에 목마른 중생들이구나, 중얼거리면서요. 나만큼 고민하며 올렸을 남들의 사진 구도, 편집, 설명 문구, 해시태그가 훤히 보입니다. 그 노력, 망설임, 자기 검열이 말입니다. 초보라도 금세 눈치챕니다. 인스타는 옷 입기와 같고, 텀블러는 옷 벗기와 같구나. 외출할 때 어떤 옷에 어떤 신발, 액세서리 조합을 할지, 화장은 할지, 선크림만 대충 바를지, 꾸안꾸 컨셉으로 갈지, 은근 신경 쓰듯이요. 채비가 됐으면 전신사진을 후딱 찍어 마지막 손질을 합니다.
반면, 텀블러는 외출하고 터덜터덜 돌아와 지친 몸을 누이는 공간입니다. 군데군데 상처 난 자존심, 2% 부족한 성과, 헛발질 등을 되새깁니다. 그러면 비슷한 취향의 텀친(텀블러 맞팔로워)들이 아무 말 없이 좋아요로 공감해 주죠.
인스타 '과시' 문화가 단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인스타에 올릴 '껀수,' 즉 외출과 만남, 행사를 은근 고대하게 되니 우울감에 허우적댈 확률이 떨어집니다. 일단 옷 입고 어디든 나가게 되니까요. 단조로운 일상에 톡 튀는 한순간을 만나면 이건 남겨야지 하며 휴대폰을 꺼내요. 맛있는 밥이 나오면 사진부터 찍어대는 행위를 더는 유치하다 생각하지 않아요. 먹음직스러운 밥이 눈앞에 놓이면 신남과 기대감이 사진에 포착되니 더 좋습니다. 아카이브까지 해주니 심심할 때 내 게시물을 스크롤해 보는 재미도 있죠.
내 인스타 게시물을 보고 있으면 그 순간을 함께 했던 아이의 손, 가족의 뒷모습이 보이고, 친구들이 사진 설명으로 남아있어요. 전체 공개하는 사진에는 없지만, 나만 아는 그 순간의 동반자들이, 사진 프레임 밖에 있는 정다운 이들이 함께 보이는 거죠. 언젠가 내 계정이 고인(故人) 계정으로 전환돼도 나를 추억하는 사람이 손쉽게 열어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아직 게시물은 많이 없어도 내가 올린 사진과 짧은 설명에는 "감사함"이 자주 들어간 걸 문득 깨닫습니다. 주말이면 공장으로 변신하는 부엌과 흡족한 결과물에 고맙단 내 코멘트가 따라옵니다. 내 텀블러 게시물엔 없는 닭살 돋는 "감사함"이 웬일로 인스타에는 넘쳐나요. 아마도 텀블러를 시작한 12년 전 나는 쿨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몰라요. 뒤늦게 시작한 인스타가 고마움으로 채워지는 건 나이 듦 때문일까요...
오프라 윈프리가 한창 감사 일기(gratitude journal) 쓰라고 전도하던 게 떠오릅니다. 미국식, 기독교식 자기 계발 만트라처럼 느껴져 한 번도 실천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최근 시작한 인스타가 어쩌면 오래전 귓등으로 들었던 '감사 일기'를 내게 쓰게 만든 건 아닌가 싶어요. 사진은 주로 낮에 찍지만, 게시물 올리는 시간대는 육퇴한 밤이죠. 어쩌다 보니 감사함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때가 많으니 참 신기합니다. 오프라 윈프리 말로는 감사 일기만큼 즉시 효과가 나타나는 습관은 없다고 했어요. 삶의 만족도를 조금은 높여주는 효과 말이지요. 과연 그럴지, 아직은 낯선 인스타를 얼마나 오래, 꾸준히 사용할지 기대해 봐야겠습니다.
마가렛 미첼 따라 하기, 독자에게 어필하는 소재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