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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허영, 바이올린

기약 없는 짝사랑

by Aragaya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가 배우는 바이올린이 좋아 보였습니다. 방과 후 담임교사는 두세 명 제자에게 교실에서 개인 지도를 했죠. 처음으로 엄마에게 뭔가를 배우겠다고 졸랐고, 곧 바이올린 들고 통학하는 무리에 끼게 됐습니다. 유연한 아이 손가락과 민감한 귀로 여러 곡을 가볍게 켜던 그때 그 시절. 담임이 바뀌어서인지 어쩐지, 짧은 바이올린 교습 시절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성인이 되고 친구와 고전 음악 덕질을 시작하며 바이올린이 다시 눈에 들어왔어요. 이번에도 친구가 먼저 장영주 덕후가 되어 나를 인도했죠. 그러다 23살쯤에 음악회 갔다가 양성식이 파가니니 협주곡을 켜는 순간, 정말 생뚱맞은 흥분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나 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 이게 웬 날벼락?! 선생님도 좋아해 보고 연예인 덕질도 해봤건만, 이렇게 뜬금없는 욕망이 터져 나온 건 정말이지 창피했어요. 친구 따라간 음악회라 양성식이 누군지도 몰랐고 지금도 관심은 없습니다. 당시 무대에 선 한 남자가 드라마틱한 곡을 연주하자 확 타오르던 생경하고 즉흥적인 감정이 미스터리였을 뿐입니다.


아무튼 우린 장영주를 과하게 좋아해 콘서트도 쫓아다니고 볼 수 있는 모든 영상을 공유하고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를 흠잡으며 그러고 놀았습니다. 그러다 홀로 극장에서 영화 "레드 바이올린"을 보게 됐어요. 저주받은 바이올린 한 대가 시대를 여행하며 악기를 손에 넣은 사람들을 차례차례 파멸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희생양 중에는 작곡가 겸 연주가도 있는데, 그는 섹스하는 와중에 '레드 바이올린'을 연주해야만 뛰어난 악상이 떠올라요. 작곡과 연주 욕심에 다른 여자와 섹스/연주하던 절정의 순간, 격분한 아내가 등장해 권총으로 악기를 쏩니다. 영화 내내 고혹적인 레드 바이올린의 피지컬과 음색이 나를 홀렸습니다. 그리고 20대 초반 연주회 좌석에서 '결혼'이란 생뚱맞은 생각으로 '검열'되어 튀어나온 내 감정의 본질을 깨달았죠. 내게 바이올린은 '오래전부터' 지나치게 섹시한 물건이었던 겁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이유 없이 끌리는 데는 원초적인 화학반응이 작용할 테죠. 나는 양성식보다는 그가 든 악기의 관능미와 파워에 압도된 거고요. 코카콜라 곡선, 바이올린 몸체, 인삼의 실루엣 모두 인간종이라서 느끼는 본능의 끌림일 테죠. 딱히 부끄러울 일도, 그렇다고 호들갑 떨 일도 아닌 그저 상식적인 현상 말입니다.


2002년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공부하며 다시 취미로 바이올린을 시작했습니다. 바투 깎은 손톱 밑,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생기길 바랐어요. 왼쪽 쇄골 뼈에도 자랑스러운 멍이 생기길 바랐고요. 그리고 내 진도는 스즈키 1권에서 더는 못 나갔습니다. 규칙적인 연습에도 생초보 신세를 면치 못한 거죠. 손가락 집는 지판 포지션 스티커는 붙이지 않았습니다. 귀로 들어 튜닝하고 스스로 정확한 포지션을 찾는 게 정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죠. 초등학교 4학년 몸과 감성은 절대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좋은 교사, 나쁘지 않은 악기, 미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2005년 말, 베를린으로 다시 이주하며 공립 음악학교(Musikschule)에 등록했습니다. 그래, 초보자 많이 다뤄본 노련한 쌤에게 지도받으면 나아질 거야. 45분짜리 내 레슨 앞뒤로는 초딩 아이들이 얌전히 대기했죠. 낭창낭창한 손가락과 올바른 자세가 부럽습니다. 그렇게 1년여를 또 투자해도 손가락도, 귀도 안 트이는 속상함은 변함없었어요. 악기는 다시 침대 밑 깊숙한 곳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코로나 락다운 시절, 넘치는 시간을 주체 못 하고 딸과 나는 바이올린과 디지털 피아노를 다 펼쳐 놓고 깽깽, 딩동댕동 놀고 있었어요. 악기 경험이라곤 유아용 실로폰, 하모니카, 좀 커서는 북이 전부인 딸은 내가 켜는 바이올린 음정을 자꾸 바로 잡아줍니다. "아니라니까, 그 소리!" 하, 열받게 자꾸 훈수를 둡니다... 기분 나빠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음감이 없다는걸요. 내 귀는 음악 감상에 만족해야 한다는 걸요. 시간과 돈을 투자해도 영 진도가 안 나가더라니. 애꿎은 짧은 손가락 탓만 한 거였죠.


이제 허영심을 내려놓기로 합니다. 얼마 전 악기점에서 나무 줄감개를 플라스틱 줄감개로 교체했습니다. 310유로를 흔쾌히 주고 나왔어요. 몇 유로 절약하겠다고 집 근처 마트 말고 더 먼 곳으로 장 보러 가는 내가 말입니다. 비트너 페그(줄감개) 덕분에 이제는 빠르게 튜닝하고, 온도와 습도에 현이 늘었다 주는 일도 없습니다. 유튜브 영상을 보고 포지션 스티커를 공들여 붙여 볼 생각입니다. 음감도 없으면서 그동안 무슨 고집으로 왼 손가락 위치 스티커를 거부했던 걸까요. 이제 훌륭한 동영상 채널을 교사로 모시고 욕심 없이 하루 20분만 연습해 보려 합니다. 2030분 넘으면 어깨 아픈 나이니까요.


문제를 정확히 알 것. 창피해도 한 번 후벼 파볼 것. 허영심이 판단을 흐리게 하지 말 것. 동시에, 욕망을 창피해하지 말 것!! 수십 년 바이올린 초보자를 역임하며 느낀 점입니다. 몸이 끌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욕망 충족은 건강입니다.



윌리엄 케인, 이디스 워튼 편. 에피퍼니 사용해 보기(깨달음을 주는 일상 에피소드)

헤밍웨이 편. "그리고"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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