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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이름 짓기 기싸움

by Aragaya

의사가 여자아이라고 귀띔해 주자 우린 이름 짓기 배틀을 시작했습니다. 주로 자전거로 어디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이름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집 가는 지름길은 베를린 녹색 심장 '티어가르텐'을 가로지르는 거였어요. 여름엔 도심보다 1도 시원하니 공원에 들어서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페달을 밟으며 나는 영업을 시작했죠.


"나무, 나무 어때!"

"나무? 바움(Baum) 말하는 거야?"

문화원에서 기초 한국어 수업을 듣던 남편이 아는 단어입니다.


"어, 나무. 나무야! 나무야~ 부르기 쉽고 짧고 이쁘잖아. 게다가 어디서든 통하는 인터내셔널한 이름!"

"그래, 특별하긴 하다. 나도 많이 찾아보는데, 유나 어때? 딱 꽂히더라고, 이 이름. 유나!"

"에? 유나? 너무 흔하잖아. 뭔가 특이하고 참신한 이름이 좋아."


그렇게 비슷한 대화가 몇 번 오가고 상대방이 별로라고 하는 이름은 각자 리스트에서 하나둘 사라집니다.


"그럼, 보리 어때? 예쁘지? 보리!"

"뭐? 보리? 안 되지. 보리스 떠올라. 면도 안 한 남자 떠 올라."

"아, 그렇구나. 독일에서 보리는 안 되겠다. 아깝다. 보리 이쁜데..."


남편은 야금야금 보수적 본색을 드러냅니다.

"이름은 딱 들으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있어야 좋아. 나무는 중성적이라 사람들이 헷갈릴 수 있어. 관청에서 막 Herr(Mr.) 누구누구 앞으로 편지 온다. 지들 맘대로 성별 바꿔서."

"그거야 그 사람들 사정이지 뭐. 사소한 불편보다는 '나무'의 상징, 분위기, 어감, 소리 다 너무 좋잖아!"

"유나도 소리, 어감 좋잖아. 부드럽고 신비롭고."

"아니, 너무 흔하다니까! 네가 아는 유나 얼마나 많냐고. 내가 아는 유나, 윤아도 너무 많아..."


특별함에 목숨 건 나는 승부수를 둡니다.

"그럼, 이름은 네가 정해. 성은 내가 정할게. 어때?"

남편 허를 찌른 거죠. 오랜 베를린살이에도 불구하고 남편 무의식에 카를스루에 토박이 보수 남이 들어앉아 있죠. 첫사랑이던 전 여친도, 그리고 나도 페미니스트라 아주 드물게만 낌새를 내비치지만요. 자기 성을 주고 싶어 한 남편은 내 제안에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날로 이름 배틀은 끝나고, 우리 나무는 어디 가나 이름 이쁘단 소리 들으며 씩씩하게 자라고 있어요. 엄마 승!


팔리어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는 굳이 말하자면 '(불교에) 귀의하다'입니다. 가끔 이름 유래를 말해주지만, 딸은 불교에는 아직 심드렁하네요. 나무가 왠지 불교를 좋아할 것 같은 강한 '예감'은 들어요. 내가 힘들 때 가장 많이 위로해 준 '불교'를 딸에게도 소개해 주고픈 마음. 거의 13년 전 아빠도 넘어간 엄마의 빅 픽처였단다, 나무야~


사진: Unsplasholaf


윌리엄 케인, 헤밍웨이 편

짧고 직접적이고 단순한 대화(고대 그리스 희곡 스티코미티아 대화법)

대화 글로 흰 여백이 주는 미적 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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