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하나: 낡은 노트, 큼지막한 Be Happy 문구, 작고 희미한 책 제목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전자책 앱에서 우연히 만난 책 표지에 철렁했어요. 아련함과 슬픔을 불러오는 이미지입니다. 은유 작가와 돌베개 조합이라 바로 대출해 읽고 있어요. 28% 읽었으니 아직 독후감 쓸 처지는 아닙니다. 다만, 책 표지와 작가가 건넨 화두 "청(소)년 노동자의 죽음"만으로도 울컥하고 울적해서 뭔가 끄적여 답답함을 달래보고 싶네요.
산업재해, 노동자 특히 사회 초년생들의 죽음은 신문 기사로, 영화로 무수히 접하지요. 안타깝고 먹먹하지만 슬픔도 잠시, 일상은 또 굴러가고, 뉴스는 묻히고, 더 강력한 다른 뉴스가 덮치듯 밀려옵니다. 은유 작가가 소개하는 김동준 군은 특성화고 3학년 재학 중 취직해 성실히 일하다가 직장 내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공장 옥상에서 떨어졌습니다. 동준 학생은 일은 시작했지만 아직 성인은 아닌,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도 사내 구제 시스템이 아닌 학교 담임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는 애매한 신분과 처지였어요.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에 있는 수많은 사회 초년생이 물리적, 정신적 보호장비 없이 정글로 걸어 들어갑니다. 살아 나오는 자와 못 나오는 자가 있을 뿐이죠. 고등학교 졸업 전 일터에 투입되는 청소년은 조금 먼 이야기,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아이들이 아니기에 더 쉽게 잊힐지 모릅니다. 한국은 대학 졸업이 기본값인 나라지요.
청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아이들 죽음을 기사로 접할 때마다 나는 저출산, 저출생 타령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떠올라요. 연금 내라고, 일개미 필요하다고 애 좀 낳으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애지중지 다 키워놓은 고3 학생 노동자 목숨에 여러분은 얼마나 애통해하시나요? 저출산 가스라이팅 언론인 여러분! 청(소)년 일개미 몇몇 죽는 건 콜래트럴 데미지인가요? 법 제정 시도마다 태클 거는 특정 당 의원들, 누더기 될 때까지 양보해 가며 머쓱해할 또 다른 당 의원들! 의원님 자녀는 고3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노동 현장에 뛰어들 필요도, 위험에 노출될 일도 없으려나요? 매일 타는 지하철 안전문을 수리하다, 매일 먹는 빵 공장에서 몸이 잘려, 매일 쓰는 휴대폰 콜 센터에서 욕 받이 일하다 죽는 사람은 없어야 하지 않아요? 만국 공통으로 노동자야 언제, 어디서나 죽어왔다지만, 한국에서는 그렇게나 귀한 '아이들'이잖아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경제 논리대로라면, 부모와 사회는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며 아이 하나에 근 20년을 투자하잖아요.
이미지 둘: 판타지 호러 액션 활극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괴짜 여중생 은영이를 유일하게 믿어주고 좋아했던 남학생 강선이가 이제는 보건교사가 된 어른 은영 앞에 유령이 돼서 나타납니다. 회색빛 얼굴에 기가 다 빠진 축 늘어진 유령 강선이 은영에게 자신이 죽은 이유를 말해줘요.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공사장에서 일하다 낡은 크레인에 깔려 죽었다고요. 새 크레인보다 목숨값이 싸다고 강선이 말해요. 어른 은영이는 그 옛날 강선이 죽었던 공사장을 찾아가 오열합니다.
나도 이 장면에서 그야말로 엉엉 목 놓아 울었어요. 축 처진 유령 강선의 목소리와 회색 얼굴이 그날 밤 꿈에 나올 정도로요. 영상은 강력합니다. 말로, 글로, 기사로 줄기차게 쓰는 것보다 단 하나의 영상이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으니까요. "다음 소희"가 나오지 않도록 영화까지 만들었으니, 제발 다음 소희, 다음 용균, 다음 동준, 다음 아이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일개미 뽑아내라고 닦달할 거면, 애 좀 낳으라며 세금을 그렇게 낭비할 거면, 사회에 첫발 내딛는 청소년, 청년만이라도 특별 보호를 좀 해 주세요.
동준이 어머니는 일하기 힘들다는 아이를 다독여 출근하게 한 그날이 평생 한입니다. 동준이는 죽기 얼마 전 담임 선생님께 힘들다는 문자를 보내요. 안타깝게도, 선생님이 문자를 확인하고 위로와 응원 답변을 보내는 사이 동준이는 생을 마감했어요. 억지로 담배를 피우게 하고, 회식을 강요하고, 구타한 직장 선배 단 한 사람만 빌런일까요? 취약한 청(소)년 노동환경을 방치한 사회가 문제일까요? 우리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알고 있습니다. 한국 청(소)년들이여, 일하기 싫으면 째라! 한국 고교 교사들이여, 취업한 제자가 힘들다고 문자 하면 당장 전화해서 "일단 병가 내, 내가 회사 담당자랑 담판할게!"라고 말할 수 있는 시스템을 함께 만들어 달라!
사진 & 출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은유 지음, 2019
http://dolbegae.co.kr/book/23218/
윌리엄 케인, 포크너 따라 하기. 공명하는, 울림 있는 마무리(resonant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