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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감에 관하여

by Aragaya Mar 09. 2025


주유소 파운드케이크. 내 인생의 밑바닥 시절, 밤이면 나는 동네 주유소로 걸어가서 파란색 포장 마블 케이크(Marmorkuchen)를 사곤 했어. 마트보다 비쌌지만, 홀린 듯 결제를 하고 그 묵직한 케이크를 들고 나왔지. 주유소를 나오자마자 능숙한 솜씨로 포장을 뜯고 케이크 모서리를 바로 한입 베어 물었어. 알아, 파운드케이크는 칼로 얇게 썰어 접시에 담아 포크로 먹는 거. 그런데, 난 그럴 정신 상태가 아녔어. 양손으로 케이크를 들고 모서리를 우걱우걱 씹으면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떨어져. 길바닥이니 상관없었어. 마치 마약 환자가 주사를 맞듯이 입속에서 뇌로 설탕이 전달되면 나는 그 잠깐은 안전함을 느꼈던 것 같아. 그렇게 텅 빈 밤거리에서 큰 케이크를 씹으며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힌 채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지. 반쯤 먹은 케이크는 조심스레 포장해서 내 방 미니 냉장고에 고이 넣어뒀어. 그건 우울증이었을까? 그렇진 않았던 것 같아. 우울감 에피소드가 맞겠다. 여러 차례 반복되는 에피소드. 나한테는 설탕 중독, 다른 이한테는 무력감, 자해, 자살 충동, 멈출 수 없는 눈물 등으로 표출될 거야. 


내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할리우드 여배우들 짤이 주로 올라와. 한두 번 '좋아요'를 눌렀더니 비슷한 취향 짤이 나와. 얼마 전엔 미셸 파이퍼가 얘기하더라. "외로움은 인간 조건"이라고. 그 짧은 말이 그렇게 위안이 되더라고. 외로움은 인간이라면 느끼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인데, 그걸 피하거나 억누르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가 안쓰럽잖아. 우울감과 외로움이 쌍으로 밀려오면 나는 '인생은 고통'이라는 부처 말씀을 부러 떠올려. 나에게 거는 주문 같은 거야. 삶이 고통임을 받아들이면 아주 가끔 따스하고, 흐뭇한 순간이 찾아올 때 감사할 수 있잖아.


몸이나 마음이 아파도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몸을 일으켜 아침밥을 준비하고, 아이 도시락으로 뭐라도 뒤적거려 챙겨 넣어 주고, 컴퓨터를 켜고 처리해야 할 버거운 일들을 해 나가. 더러워진 변기도 언젠가는 솔로 닦아내야 고, 흐린 눈으로 지나치던 뭉친 머리카락과 먼지도 결국 청소기로 없애주긴 해야 해. 어김없이 밥때는 찾아오고, 뭔가를 꾸려 식탁에 올리고, 식기세척기를 돌리고, 또다시 양치질할 시간. 마음이 아파도, 몸이 아파도 한없이 미룰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해. 너의 일상도 그렇게 굴러갈 것 같아. 아무리 아파도 아이들을 학교에서, 어린이집에서 데려오고, 끼니를 해 먹고, 언젠가는 잠자리에 누워야 할 테지. 아이들 눈망울을 보며 미안함과 슬픔이 밀려와 많이 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하루가 또 가고 우리 몸은 늙고 눈은 흐릿해지겠지.


나는 너 앞에서 말조심하려 노력해. 평범한 위로의 말, 힘내라는 상투적인 말, 이렇게 해보면 어때, 하는 조언과 훈계를... 너는 참 많이도 들었을 것 같거든. 나는 너와 비슷하기에 딱히 해줄 말이, 해결책도 없어. 죽지 않고 하루를 굴려서 내일로 올리고, 다시 떨어져 내 앞에 온 하루를 밀고 나갈 수밖에.




윌리엄 케인, 카프카 편(주제 의식 드러낸 인상적인 첫 문장. 카프카적(부조리) 상황, 카프카에스크)


사진: UnsplashT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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