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소년의 시간(Adolescence)"
*** 넷플릭스 "소년의 시간"을 본 후 창작한 가상 대화입니다 ***
아내와 남편
"어디서 뭐가 잘못된 걸까?" 남편이 애원하듯 아내를 보며 말한다. 자기 잘못이 없다고, 아내가 위로해 주길 간절히 바랐다. "난 최선을 다했는데... 뭘 더 했어야지? 좀 더 벌고 좀 더 노력하면 될 것 같았어. 좀 더 버티면 곧 한숨 돌리고 편안한 시기에 접어들 거 같았어." 목이 쉰 남편은 고개를 떨군다. "자긴 좋은 아빠였어. 아니 좋은 아빠야, 여전히. 우리가 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벌어진 일들이야." 남편은 그렇게 원하던 답변을 아내에게 듣자, 안도감이 몰려온다. '내 잘못이 아니야...'
소년과 심리학자
'더 어려운 케이스도 잘 해냈잖아. 차분하게, 건조하게, 너무 차갑진 않게, 다시 가보자.' 심리학자는 굳어진 얼굴 근육이 풀리길 바라며 소년에게 최대한 또박또박 말을 건넨다. "네 솔직한 심정이 듣고 싶어. 그건 수치심이었니? 아니면 분노였니?" 소년은 맑고 큰 눈동자를 반짝이며 미소 짓는다. "왜요? 분노라고 하면 점수 나쁘게 줄 거예요? 뭐, 아무래도 수치심이라고 해야 나한테 더 유리하려나? 그래요, 수치심이라고 적어요. 어서 거기 노트에 적어요. 수.치.심." 소년은 냉소를 택해 가시 돋친 단어들을 내뱉지만, 삐쭉이던 입술 끝 미소는 사라졌다. 입술이 닫히자, 소년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변했다. 심리학자는 가슴 한구석이 저렸다.
소년과 누나
집에서 보는 동생과 학교에서 마주치는 동생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학교 식당에서 동생과 친구들을 보자, 리사는 동생에게 다가간다. "오늘 저녁에 아빠 일찍 오시는 거 알지? 다 같이 저녁 먹기로 했으니까 시간 잘 지켜!" 동생 대신 그의 절친 하나가 대꾸한다. "시간 잘 지켜어~ 집에 빨리 들어와앙~ 점심은 먹었니이, 우리 아가!" 동생은 친구들과 낄낄대며 리사에게서 멀어진다. 리사는 불안감에 짓눌린다. 지난 반년 간 동생이 점차 빨려 들어가는 저 세계는 날카롭고 축축한 무엇이다.
새벽 1시. 다시 잠에서 깬 리사는 더는 참지 못하고 일어나 동생 방문 앞에 섰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내 방에 다 들린다고. 내일 학교 안 가? 왜 나까지 잠 못 자게 하냐고!" 대답대신 동생은 동영상 음량을 확 키운다. 화들짝 놀란 리사의 가슴이 벌렁댄다. 이길 수 없는 싸움. 17년 차.
소년과 소녀
"뭔데? 너 스토커야? 신고해 줘?" 소녀는 경멸 가득 담아 소년을 노려본다. 소년은 다시 용기 내 부탁한다. "그거 지워달라고. 없애줘, 제발. 네가 원하는 거 다 할게. 말만 해." 소녀는 소년에게 다가와 처음으로 그를 정면에서 마주 본다. "다 한다고, 내가 시키면?"
넷플릭스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 총 4편은 무수한 질문을 쏟아내며 끝납니다. 1편에서는 동급생 여학생 살인 혐의로 13세 소년을 체포한 후 경찰서 구금 절차, 부모와 변호사, 형사 등 관련 인물을 보여줍니다. 압도적 몰입감으로 말이죠. 1편이 '영화적' 완성도가 가장 높습니다. 형식은 총 4화 '드라마'지만 편집 없이 1시간씩 진행되는 매 화는 '영화적' 긴장과 몰입을 끌어내니까요. 가장 크게 화제 된 3화 심리학자 VS 소년 대화 배틀은 불편한 부분이 좀 있지만, 저도 당연 압권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4화는 좀 아쉬워요. 부모가 나누는 살짝 교조적인 대화에 주제 의식을 몽땅 담으려 한 느낌이에요. 직접 대화 형식으로 메시지를 꾹꾹 눌러 전달하기보다, 더 자연스러운 다른 장치를 이용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이웃, 큰딸 등 제삼자에게 '암시'하는 장면을 부부간 대화에 섞었더라면 더 매끄러웠을 것 같아요.
"소년의 시간"이 펼쳐 보인 여러 사회문제 중 나는 매일 아이들이 오랜 시간 보내는 장소, 학교의 현실에 꽂혔습니다. 제2화가 학교 편입니다. 우린 소녀와 소년을 너무 오래 가둬 두죠. 손에는 휴대폰을 쥐여주고, 지루한 교과목을 끝도 없이 들이밀고, 지치고 무력해진 교사들 호소엔 어쩔 줄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바뀌는 건 없습니다.
대안이 있냐고요? 대안을 짜내봐야죠. 사소해 보이는 것부터라도, 시작이라도 해봐야죠. 예를 들어, 체육 수업과 야외 활동을 대폭 늘리는 거죠. 아이들을 학교, 학원 등 건물에 가둬두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햇볕 쬐고, 비도 맞고, 나무와 숲, 강에서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게 돕는 겁니다. 찔끔 아니라 그냥 교과목 절반을 줄여서 예체능으로 대체하면 좋겠어요!! 어차피 AI가 대체할 사무직 계속 양산할 필요 있나요?
야외 활동, 소풍, 밭일, 수학여행에 특화된 교사들, 신체 활동과 예술 활동에 특화된 교사들 대대적으로 양성하는 겁니다! 생각만 해도 흐뭇하네요.
지금 중1인(7학년) 우리 딸은 미술과 체육을 가장 좋아해요. 그런데 이런 과목들은 한국이건 독일이건 천대받는 것 같아요. "소년의 시간"에서 제이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어요. 또래 남자아이들 문화에 빨려 들어가 미술 따윈 잊었겠지만요. 그래도 제이미의 '자기표현'을 적절하게 돕고 지도해 줄 교사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요.
물론 다 가정입니다. 중대 사건은 늘 여러 작은 사건과 힌트와 우연이 모여 대폭발 하니까요. 어느 한 가지를 딱 집어 문제 삼기 어려워요.
어쩌다 보니 교조적 글이 됐군요. 쩝.
필립 케이 딕의 대화 전개(첫 문장에 화자 언급, 대화 도중 인물 움직임 묘사해 장면에 활력 주기)
"소년의 시간" 인물 간 '가상' 대화.
이미지: 넷플릭스 "소년의 시간(Adolescence)" (2025)
https://www.netflix.com/title/817560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