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 지옥
아버지 방문 손잡이는 누런 때와 기름으로 반들거리고, 불그스름한 녹이 박혀있다. 한 손에 밥그릇을 든 아들은 나머지 손으로 손잡이를 계속 돌려본다. 끈적 미끄러운 동그란 쇠붙이는 드륵드륵 소리만 낼뿐 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는다. 방 안에서 아버지 옅은 한숨이 들린다. 멀건 미역국에 밥을 넣은 그릇을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두고 아들은 뒤를 돌아 현관 앞 걸레를 집는다. 걸레 쥔 손으로 손잡이를 덮고 힘껏 오른쪽으로 돌린다.
문이 열리자 달큼한 곰팡내가 거실로 달아나듯 빠져나온다. 어둠에 잠시 적응한 다음, 아들은 녹색 담요가 전신을 덮은 아버지 몸과 부쩍 커진 얼굴을 확인한다. 어제보다 양 볼이 더 부으셨다.
"압지, 밥."
선 채로 아들이 말하자 아버지는 천천히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린다.
"오늘은 먹어야지, 밥. 멱국 했어라."
"..."
아버지는 어제 유동식조차 거부하셨다. 아들은 밥그릇을 아버지 머리맡에 두고 옆에 쪼그려 앉는다.
"압지, 쉬는?"
"아녀."
그제야 첫마디를 뱉으신다.
아들은 담요를 들어 올려 젖혀두고 아버지 골반을 양손으로 힘껏 밀어 모로 세운 후 엉치 욕창 부위를 확인한다. 움푹 파여 분홍 생살이 드러난 상처 주변에 대일밴드 때가 먼지와 엉켜있다. 그는 능숙하게 연고를 바르고 의료 밴드로 교체한다.
"압지, 한 술만 떠."
"..."
"멱국 잘 드시잖어."
다시 반듯이 누운 아버지 상반신을 양손으로 움켜쥔다. 베개로 받히고 밥을 먹일 요량이다.
“아녀.”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벽만 바라보던 아버지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아들 눈을 바라본다. 흐릿한 회색 눈이 아들을 응시한다.
"아니여. 그라고 니는 인자 이 방에는 들어오지 말어."
"압지, 자꾸 그라믄 내가 확 죽어!"
3년 간병 기간, 단 한 번도 화낸 적 없는 아들이 처음으로 아버지를 협박한다. 아들의 심장은 요동치고 콧물과 땀이 주룩 흐른다. 쿵쿵하는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가 무서워진다.
아버지가 쓰러진 후 간병 기간에, 아들은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성인이 되었으며, 하던 알바를 그만뒀고, 복지사와 요양 보호사를 피해 다녔으며, 친척 아주머니에게 사기를 당했다.
마른 몸매는 더 쪼그라들었고 부엌에 남은 식량은 쌀 3킬로와 양념장, 미역, 달걀이다.
처음으로 화를 내고 나니 자신감인지 억눌린 무언가가 폭발한 건지, 그는 멈출 수가 없다. 배에 힘을 주고,
"그럼, 압지 맘대로 해!"
빽 소리를 지른 다음, 식은 밥그릇을 챙겨 들고 방문을 꽝 닫고 나온다. 아들은 현관에 서서 미역국 쌀 죽을 싹싹 긁어먹는다. 심장은 아직 벌렁거리고, 식은 밥은 술술 잘 넘어간다.
그 후 아들은 총 3일간, 화장실 2번 갈 때 빼고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평생 자신에게 헌신했던 아버지 유언을 결국 따른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친절한 경찰관에게 가혹한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
윌리엄 케인에 영감 받은 '거장 따라 하기' 습작 시리즈가 거의 끝나갑니다. 이번에는 ‘뉴 저널리즘’ 기법을 강조한 톰 울프(Tom Wolfe)를 따라 해 봤습니다.
‘뉴 저널리즘’을 홍보했던 톰 울프와 트루먼 카포티 주장은 까려면 깔 게 많습니다. 뉴 저널리즘이란 르포타주, 심층 취재 기사 등에 ‘소설 기법’을 활용하자는 말입니다. 인물 간 대화, 극적 장면(씬), 취재 대상의 의식에 파고들어 감정과 생각을 최대한 극적으로 노출하자고 합니다. 1960년대 주장이니 좀 봐주고 넘어가려 해도, 영 찜찜하죠. ‘저널리즘’ 객관성과 반대되는 형용 모순이니까요. 픽션과 논픽션을 섞자는 말처럼 들리죠. 그래서 이런 식의 뉴 저널리즘은 오래 못 가고 사라진 듯합니다.
단, ‘뉴 저널리즘’을 허구(소설)에 활용해 보는 건 무해하지 않을까 싶었죠. 그래서 톰 울프, 카포티와 반대로 몇 년 전 신문 기사에서 읽은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적 실화를 기억에서 끄집어내 ‘허구’를 써봤습니다. 나이, 상황 등을 다 바꿨어요. 대신 인물 내면에서 벌어지는 감정 소용돌이를 가장 격한 인간 체험인 ‘죽음’을 염두하고 써 봤습니다. 복지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이들 이야기를 사회가, 우리가 더 많이 다뤘으면 하는 마음에서 긴 합니다.
트루만 카포티는 천재적 작가지만, 작가 윤리, 취재 윤리 외줄 타기 곡예가 위태로웠죠. 살인마와 라포를 형성하며 뛰어난 르포를 완성해 성공을 거두지만, 자신의 윤리의식과 충돌하며 결국 마음의 짐을 평생 안고 간 것 같습니다.
뉴스는 사건사고, 비극을 좋아합니다. 저널리즘은 어쩔 수 없이 차갑고 가혹할 때가 많습니다.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읽지는 않았지만, 최애 배우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트루만을 연기한 "카포티"를 숨죽이며 보긴 했습니다. 이 영화는 카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를 뉴 저널리즘 기법으로 쓰고, 인터뷰하고, 출판해 성공한 과정을 다룬 차갑고 뜨겁고 무서운 영화입니다.
책이 대박 났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 카포티를 잠식한 건, 혹시 '뉴 저널리즘'이라는 변종 때문은 아닐지 의심해 봅니다. 살인마와 공감대를 형성해 소설적 긴장과 인터뷰를 멋지게 버무려 낸 그 형식 자체(픽션 같은 논픽션, 논픽션 같은 픽션)가 작가 무의식에 트라우마를 남긴 건 아닐까 의심해 봅니다.
혹시 나도 위에 그런 글을 썼을까요... 습작이라는 외피를 쓰고 누군가의 고통에 허구를 가미해 새로 포장해 내놓은 걸까요. 구체적 사실은 많이 바꿨지만(서머싯 몸), 바로 이런 행위로 아버지를 잃은 그 이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전시했는진 모르겠습니다. 소설을 쓰고 싶은 나는 허구와 팩트를 섞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건 아닐까 싶어 맘이 쫄립니다.
사진: Unsplash의Eyasu Etsub
윌리엄 케인, 톰 울프 따라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