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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캠핑장, '사라진 딸'

스티븐 킹 따라 하기

by Aragaya


텐트 지퍼를 쑤욱 내리고 슬리퍼에 주섬주섬 양 엄지발가락을 끼워 넣고 '으쌰'하며 일어난다. 텐트 밖 공기는 상쾌하다. 남편은 버너로 물을 끓이고 달그락달그락 아침 식사 준비 중. 캠핑장은 고요한데 유독 새들이 요란스레 울어댄다. 이슬 먹은 풀밭, 퍼런 하늘, 돌돌돌 물 끓는 소리. 그리고 이 모든 걸 압도하는 사이렌 같은 새소리.


"나무는?"

"어제 사귄 애랑 호수 놀이터 갔어."

"아침부터??"


어제 캠핑장 도착 후 딸은 또래 여자아이를 사귀어 두었다. 6살 외동딸은 여행지에 오면 놀만한 아이가 없는지 자동으로 스캔한다. 평소 외향인은 아닌데 여행지 친구 사귀기에는 어째 적극적이다. 우리야 좋다.


화장실에 다녀온 후 남편 옆자리에 앉아 커피를 준비한다.


"근데, 나무는 물은 마시고 놀러 간 거야?"


"몰라, 마셨나?"


'으이구, 애 건강 챙기는 건 맨날 내 몫이지. 나만 잔소리꾼이고.' 한 소리 하려다 꿀꺽 삼킨다.


"놀이터 간 지는 얼마나 됐어?"


"음, 한 10분? 20분? 아침 준비하는 데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까, 곧 오겠지."


어제까지 꽤 북적대던 캠핑장은 왠지 한산하다. 앞자리 대가족 텐트도 철수했고, 늘 들리던 아이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니, 어제 잠시 논 애랑 아침부터...'


불편한 건지, 불안한 건지 암튼 찜찜하다. 내색은 안 한다. 잔소리쟁이에 민감 소심형 엄마인 나, 웬만한 건 다 허용하고 무딘 남편. 나랑 있으면 아이는 자주 짜증을 부리지만, 아빠랑은 죽이 잘 맞는다.


남편이 스크램블드에그를 만드는 사이,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딱딱한 빵을 스위스 칼로 얇게 자르고 세 명 접시, 포크, 나이프를 뒤져와서 소박한 아침상을 차린다. 어느새 새소리가 잦아들었다.


"호숫가 놀이터, 정글짐 있는 거기 맞지? 나무 불러올게."


"놀다 보면 좀 늦을 수도 있지 뭐. 우리 먼저 먹기 시작할까?"


"아냐, 나무 불러와서 같이 먹자."


난 슬리퍼를 끌며 호수 놀이터로 향한다. 오른쪽 텐트 공간들은 비어 있고 왼쪽 장기 숙박 캠핑카에는 인기척이 없다.


'어제 저녁엔 분명 떠들썩했는데. 다들 늦잠인가?'


5분 거리에 있는 호수에 도착하니, 백사장은 유난히 하얗고 아침 호수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낡은 정글짐이 덩그러니 홀로 있다.


'뭐지? 아무도 없잖아!!'


호숫가는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기에 아이 둘이 숨을 만한 공간도, 사각지대도 없다. 정글짐 옆쪽 샛길을 따라 보트 하정차 공간으로 내려가 본다. 빈 보트 서너 대만 바람에 하늘거릴 뿐 인기척은 없다. 다시 정글짐에 와 본다.


갑자기 영화 장면 같은 내 처지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기분 나쁜 기시감. 걸음걸이가 빨라진다.


"나무! 나무야!" 외친다. 백사장에 슬리퍼 발이 푹푹 빠진다.


"어딨어? 나무야!" 한국말로 크게 지른다. 헝클어진 머리, 노브라 반소매 티 차림으로 날카롭게 아이 이름을 부른다.


'혹시 길이 어긋난 건가? 벌써 아빠한테 가 있는 거 아냐?'


단숨에 우리 자리 쪽으로 뛴다. 빈속에 커피를 마셔서 그런지 긴장해서 그런지 배가 살살 아프다. 헐떡거리며 남편 앞에 서서 "나무는?"하고 다그친다.


"호숫가에 없어?"


남편은 태평한 얼굴로 되묻는다.


"나무 안 왔다고? 뭐야? 나무는커녕 사람 하나 없던데! 어떡할 거야? 걔, 어제 그 여자애 말야. 어느 캠핑카였지? 호숫가 왼쪽으로 쭉 가면 보이던 회색 자이언트 캠핑카, 그거지?"


속사포로 쏟아낸 후 한 마디 덧붙인다. "자긴 여기 있어. 나무 여기로 올지 모르니까."


남편 대답은 들을 새 없이 다시 호수로 뛴다. 백사장에 중년 남자가 서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는다.


"여기 여자애들 둘 혹시 못 보셨어요? 대여섯 살 애들 두 명이요. 한 명이라도 못 보셨어요?"


남자는 사람 좋은 얼굴로 답한다. "여자애 둘이랑 큰 개 한 마리랑 아까 본 것 같아요. 근데 꽤 됐는데. 백사장에서 본지."


"큰 개라뇨?! 얼마 전쯤 보셨어요? 애들이요?"


"아마 30분 전쯤인 것 같은데요? 아이 둘하고 큰 개 한 마리."


남자가 스마트 워치를 보며 말한다.


'아니, 뜬금없이 무슨 개야... 큰 개??'


혼잣말을 삼키며 여자아이 가족 캠핑카를 찾아 호수 왼쪽으로 뛰어간다.


덩치 큰 회색 캠핑카는 없다.


'분명 이쯤이었는데...'


땀이 쏟아지고, 오전인데도 햇볕이 따가워 눈이 시리다. 가슴은 콩닥거리는데, 방금 마주친 그 남자가 이상하다.


'아니, 웬 개? 그리고 30분 전이라고? 뭐가 말이 안 맞는데? 차림은 왜 또 그리 말끔해! 캠핑하러 온 사람 맞어?'


잰걸음으로 양 눈알을 180도 굴리며,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볼 사람을 찾는다. 장기 투숙자 캠핑카 앞에 노년 부부가 앉아 있다. 어제 나와 나무를 고깝게 보던 구동독 특유의 비호의적 눈빛이라 기억한다.


"혹시 이 주변에 한 6살, 7살 금발 여자아이 가족, 어느 자리인지 아세요?"


"Wie bitte?(뭐라고?)"


노부부는 표정 변화 없이 말한다. 난 다시 천천히 말해준다. 속으론 욱한다. '다 알아들으면서 왜 저래...'


"몰라."

여자 노인은 냉랭하게 말한다.


기대도 안 했지만, 1분이란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아 화난다. 쌩하고 지나치며 어쩔 수 없이 우리 자리로 다시 뛰어간다. 백사장을 흘깃 보니 스마트 워치 남자는 가고 없다.


땀에 젖은 티셔츠는 몸에 찰싹 달라붙고, 슬리퍼 밑창에 뾰족한 자갈이 박혀 왼발을 찌른다. 남편이 등 돌리고 있다가 인기척에 돌아본다. 얼굴에 웃음기가 어려있다. 순간 맥이 탁 풀린다.


'왔구나.'






'아이가 사라졌다'는 공포감은 부모라면 한두 번 체험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 어릴 적, 브란덴부르크주 캠핑장에서 경험한 그 아침의 공포감을 떠올려 써 봤습니다. 이번 주 따라 해본 작가는 스릴러 대가 스티븐 킹입니다.


글벗들과 함께 한 '거장 따라 하기' 마지막 작가 스티븐 킹. 책을 읽은 적은 없지만, 원작을 영화화한 건 꽤 봤네요. "샤이닝," "미저리," "돌로렌스 클레이본," "쇼생크 탈출," "스탠바이 미"를 봤어요(출처: https://lithub.com/the-living-authors-with-the-most-film-adaptations). 모두 흡입력 뛰어난 작품이죠. 스티븐 킹 원작인 줄 모르고 본 것도 있고요.


윌리엄 케인이 요약한 스티븐 킹의 서스펜스 빌드업 순서는 이렇습니다.


1. 불길한 예감 언급

2. 반복 언급

3. 서스펜스 최고조 장면(결투, 페이오프)


복선 깔기 또는 떡밥 회수랑 닿아있죠. 영화는 문학보다 한참 뒤늦게 태어난 장르에다 상업과 예술의 만남이지만, 이 두 장르는 공통점이 많죠. 스티븐 킹은 어린 시절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커서는 영화평도 꽤 썼고요. 나중에는 소설도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썼겠죠.


윌리엄 케인의 작가와 책 묘사를 읽으며 요새 유행하는 드라마, 영화 장면이 자꾸 떠올랐어요. '그래, 이 테크닉 저 영화에서 썼잖아.' 동시에, '난 왜케 읽은 책이 없지?' 생각했어요. 죄다 원작을 영화화한 것만 떠올랐으니까요.


책이든 영화든 우리 일상이든 '스토리텔링 핵심은 서스펜스'라고 합니다(윌리엄 케인). 아이에게 읽어준 수많은 동화책에도, 늘 접하는 광고에도, 친구가 들려주는 여행담에도 '서스펜스'가 단골로 등장하죠.


픽션을 쓸지, 논픽션을 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유명 작가들 테크닉을 모방해 익힌 것 중 적어도 한두 가지 기술은 찰떡처럼 내 손끝에, 머리에 오래 남아 있길 바랍니다.


글쓰기를 사랑하는 모두에게 인사합니다. '함께 가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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