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것도 해볼 준 몰랐지
오늘 복싱을 영어 철자로 쓰면 중국어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복-싱, 그런데 또 이게 BO+XING으로 보이는 것이다. 고마워, 밥 먹었니, 정도나 말하고 쓸 수 있는 내가 그나마 쓸 수 있는 중국말 중 하나가 很高兴(hen gaoxing)인데, 뭔가 boxing이 bo+xing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네이버 중국어사전에서 'boxing'을 입력해 보니 勃兴[ bóxīng]이라는 단어가 있다. 발흥하다, 융성하게 일어나다, 라는 뜻이란다. gaoxing의 xing과 같은 한자다! 찾아보니 xing은 '흥'이라는 의미로 여러 단어에 쓰이는 것 같다.
일상에 무언가 발흥한 날이다. 새로운 흥이 생겨난 날. 첫 복싱 수업을 듣고 왔다.
처음 보는 매니저 선생님이 왜 복싱을 배우게 됐냐고 물어보신다. 그러게, 왜 갑자기 복싱을 등록하게 됐을까. '언젠가 한 번 배워볼 것'의 목록에는 늘 '(웬만해서는) 배우지 않을 것'들이 모여 찰랑이고 있다. 그 리스트에서 무언가가 뾱 빠져 나오는 일은 예고없이 일어난다. 그냥 해보지 뭐, 하는 식으로. 언젠간 해보고 싶지만 지금 하고 있지 않은 일에는 공통점이 있다. 대개 할 이유도 없고, 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것. 그러니 거창한 마음 없이 시도하면 된다. 그래도 '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데는 어떤 계기가 있다. 급격히 마음이 동하거나, 급격히 필요가 생기거나.
복싱이 뾱 빠져나오게 된 이유는 후자에 가깝다. 낮엔 피곤한데 밤엔 맛있게 자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동안 산책과 가끔 하는 러닝, 집에서 하는 근력운동과 요가로도 체력 관리가 충분하다고 느껴 최근엔 헬스장이든 필라테스 센터든 따로 다닌 적이 없는데, 이제 처방이 필요했다. 밤에 거의 기절한듯 자게 해줄 꽤 격한 운동.
10분 동안 사이클을 타니 줄넘기를 2라운드 동안 뛰라고 하신다. 시계는 7시 27분. 마지막으로 언제 줄넘기를 했을까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폴짝거리던 게 생각났다. 그때부터 쫌쫌따리로 몸을 움직이는 즐거움을 알았지. 아, 좀 힘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한번 참았고, 줄이 발에 채이기 시작할 때 또 참았고, 슬슬 숨이 턱에 차기 시작했을 때 마침내 시계를 봤다. 잠깐 흘러내리는 양말을 정리하는 척하며. 시계는 아직도 2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절망의 줄넘기가 끝나고 섀도우 복싱을 시작했다. 원투 자세를 먼저 배웠다. 오른발이 왼발보다 확실히 오른쪽으로 나가야 된다고 여러 차례 교정을 받았는데, 하체는 45도로 유지하면서 주먹은 앞으로 뻗는 게 영 어색했다. 어색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모든 것이 어색했다. 원, 하며 허공에 짧은 왼팔을 휘두르는 걸 거울로 똑바로 쳐다보려니 웃음이 목구멍에 찼고, 투, 하며 오른팔이 앞으로 나오는 모습은 더욱 가관이어서 웃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오른쪽 발꿈치를 들어보세요, 라는 지시에 뒤에 디딘 발을 들었다. 헛웃음이 터진 선생님이 다시, 발꿈치만 들어보세요, 라면서 직접 시범을 보여주신다. 90도로 들어올린 뒷발이 마치 커피잔을 들때 나도 모르게 마중나간 새끼손가락처럼 느껴져 부끄러웠다. 선생님이 가시고 혼자 연습을 한다. 이 정도면 몸에 익은거 아닌가, 했을 때 깡충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깨닫고 웃음이 터졌다. 거울 속 내가 너무 못나고, 또 웃겼다. 그 순간 이 운동이 조금 좋아졌다.
쉬는 시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사람들 모두 자신의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선생님이 들고 있는 미트에 잽을 날리는 사람을, 샌드백을 치는 사람을, 줄넘기를 뛰는 사람들을 보았다. 내 눈에는 모두가 노련해보인다. 다들 멋있구나, 감탄했다.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는 느낌이 안 들게 조심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들 자기 운동을 하느라 바빴다. 거울 앞에서 섀도우 복싱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해 보였다. 그 순간 이 운동이 조금 더 좋아졌다. 그래서 정말 좋았다는 말을 쓰기 위해 한참 동안 잠들어있던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좋아질지 기대된다. 복싱, 헌까오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