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단 불꽃 지음 / 이봄
며칠 전 갑자기 부끄러운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꼭 연락하는 친구에 대한 기억이었다. 직업도, 지역도, 취향도 다 다른 친구지만 졸업하고 한참이 지난 지금도 줄곧 소식을 주고받는다. 1년에 몇 번 만나지 못하는데도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카톡으로 연락하는 것도 편하게 느껴지는 친구다.
친구가 학창 시절 한 선생님에게 말도 안 되는 사소한 이유로 손찌검을 당했던 적이 있다. 친구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 같다. 그 선생님에게 맞서 달라고 했는지, 다른 선생님에게 이야기해달라고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쨌든 선생님들에게 썩 이미지가 나쁘지 않은(?) 내가 논리적으로 문제제기를 해달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친구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 친구가 나를 어떻게 보았든 간에 나는 선생님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거나 애교 있게 다가가는 학생이 아니었고, 그런 친구들보다 내 말이 더 먹힐 거라는 기대를 전혀 할 수 없었다. 선생님들이 문제를 해결해줄거라고 믿지도 않았다.
그리고 눈앞에서 비논리적이고 부당한 폭력을 목격하고 난 직후였다.
힘없는 교복쟁이였던 내가 어떻게 얄량한 논리로 그 부당함을 이길 수 있을까. 친구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던 것은 나서는 게 싫었기 때문이 아니다. 선생님들의 심기를 거슬러 눈밖에 나지 말아야겠다는 계산 같은 것도 없었다. 그냥 겁이 났다. 그렇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그때 돌아섰을 때도, 지금까지도 후회한다.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을. 그날 이후 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친구는 굉장히 서운했을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아마 스스로 겁쟁이라고 인정하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책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읽었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취재해 디지털 성범죄의 실상을 알린 '추적단 불꽃'이 쓴 책이다. 두 사람은 저널리스트를 꿈꾸던 대학생이었다. 탐사보도 공모전에 공동 응모하기 위해 소재를 찾던 중 텔레그램에서 디지털 성착취물이 공유되는 정황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 있었다. 불법 촬영물이 유통되는 것은 물론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조직적인 성범죄가 자행되고 있었다.
끔찍한 범죄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불꽃은 경찰에 신고해 수사에 적극 협조한다. 최초로 사건을 보도함과 동시에 최초 신고자가 된 것이다. 2019년 9월, 그들이 써낸 기사가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지만 반향은 미미했다. 이후 11월 한겨레신문에서 N번방을 모방해 만든 박사방에 대해 보도하면서 사건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었다. 해를 넘겨 2020년 3월, 박사방의 운영자 조주빈이 검거되면서 추적단의 그간 활동도 새삼 주목받았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추적단 불꽃을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대학생들'로만 기억했을 것이다. 맞다. 그들은 추악한 범죄를 묵과하지 않고, 범죄의 소굴로 직접 들어가 더 많은 피해자를 구하려고 힘썼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영웅이다. 하지만 책을 보지 않았다면 알 수 있었을까. 밤부터 새벽까지 하루 5시간을 텔레그램에 접속해 범죄 증거를 모으고, 기사를 다 쓴 다음에도 자신이 피해자인 줄도 모르고 있었던 더 많은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뛰어다녔던 것을.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뀐 것이 없다는 참담함과 실망, 회의와 자책에 시달려야 했던 그들의 숱한 낮과 밤을.
이들이 봐야 했던 '증거'는 평범한 내용이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충격적인 사진과 영상에 노출된 탓에 그들 역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래서 상담 치료와 명상을 통해 자신들이 입은 심리적 외상을 치유하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멈춰서는 일은 없다. 대신 "이제 시작이다"라고 말한다. 조주빈 검거 이후 갑자기 쏟아진 언론의 관심에 살인적인 스케줄을 전부 소화했던 것은 디지털 성범죄의 실태를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여전히 법의 허점과 수사기관의 안일한 태도를 노린 디지털 성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 불꽃은 경찰, 정부기관, 각종 사회단체와 협력해 디지털 성범죄의 근절에 힘을 쏟는다.
책을 읽었기에 알게 된 것은 또 하나 있다. 불꽃을 이루는 '불'과 '단'은 서로가 없었으면 힘든 시기를 이겨내지 못했을 거라고 고백한다. 불꽃은 그 둘이 함께 있었을 때만 불꽃이다.
'우리'가 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우리'는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을 현실로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되는 일에는 충분한 용기가 필요하다. 부당한 현실에 눈감지 않을 때, 세상을 다 가진양 착각하는 폭력을 함께 비웃고 벌할 때 우리는 더 큰 우리가 된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를 비로소 우리라고 부를 수 있다. 친구가 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새해마다 행복한 삶을 위한 할 일 리스트를 정리해왔다. 언젠가부터 뚜렷한 기한과 목적이 있는 목표 사이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됐다. 올해는 조금 더 용기를 내자. 조금 더, 조금 더. 그러다보면 너도 나도 숨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