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의 종이책

Ep.01. 낡은 유물

by 그레용

모스부호 같은 진동이 울린다.


인공지능 e북 리더기 ‘홀로’였다.

아침 8시.


"잘 잤어요? 아라님. 뇌파는 좋아진 것 같아요."


내 주치의 톡스(talks)였다.

화면 가득한 그의 얼굴 위로 목소리가 통통 튀어 올랐다.


"종이책은 특히 잠자기 전엔 읽으면 안 돼요."


뜨끔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검지를 스캐너에 갖다 댔다.


"옅은 징후이긴 한데 손톱에 증상이 있네요. 종이책보다는 리더기를 이용하시고, 꼭 링크를 눌러서 뇌파를 확인해 주세요."


잔소리가 이어진다.

'몸을 움직여라, 여행을 가라, 어찌, 해라.'

잔소리와 관심의 경계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런 무지 때문에 그를 떠나보낸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 인공지능사회에선 몸을 움직이는 일이 인간의 로망이 된 지 오래다.


"사각사각 마음이 가지런해진다. 연필 깎는 마음일 테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따라 내 어깨에 앉은 반딧불이가 반짝거린다.


"도르르 눈썹달 같은 나무가 몇 꺼풀 벗겨지고 연필심이 드러날 때면 슬며시 심향이 퍼진다.


사각사각 비스듬히 갈리는 굴곡진 선을 따라 마음이 가지런해진다.


연필 깎는 마음일 테다.


아침의 안녕과

저무는 하루에 기도하는 마음


그 어딘가에 머무는 마음일 테다."


벤치 앞을 난 걷고 또 걸었다.


"연필? 그래! 연필!"


단어 하나에 향수가 느껴졌다.

물소리에 귀가 간지러워 갸웃하는데, 구름을 휘감은 초승달 옆으로 별 하나가 졸고 있는 게 보였다.


[이제 잠을 자야 합니다]


단호하게 채근하는 목소리.


"홀로! 안 돼! 이제 막 책을 폈어!"


[그건 당신의 산책 시간이 길었기 때문입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런데 말이야. 이름을 불러줘."


[예, 아라님]


"아니, 아라."


[예, 아 ]


내가 만든 공간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하다니.


의식보다 내 눈이 먼저 떴다.

이른 새벽, 내 손은 더듬더듬 침대 위 책에 닿았다. 보랏빛의 검지 손톱이 아른거렸다. 놀랍지도 않다. 익숙해진다는 건 이렇게 무섭다.


감정이 의식을 파고들었다. 이 보랏빛은 무의식 속에서 꿈틀대다가 급기야 타투와 같이 이렇게 손톱에, 때로는 머리카락에도 새겨졌다. 정확히는 감정의 잔상이 무의식을 이용해 제멋대로 내 몸에 표현되는 상태였다.


알레르기와도 같은 이 증상의 원인은 스트레스, 엉뚱하게도 그 원인은 종이책을 지목하고 있다.


난 구식의 활자 모음집이란 오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그가 떠난 자리는 종이책으로 채워져 갔다. 이제 사랑도 종이책을 따라 낡은 유물이 되려나 보았다.


"응?"


홀로가 깜박였다.


"휴~ 이제 일어났어."


뇌파를 체크하던 습관처럼 링크에 손이 갔다.


이런!


꺼졌다.


웬일인지 제어조차 할 수 없었다.

집까지 들고 온 회사 일도 있는데, 낭패였다.


난 외출할 때 의식처럼 정리하던 손톱도 정리할 새 없이 서둘러 집을 나섰다.


청록색의 하늘은 한껏 드높았다.

불현듯, 빈티지 마켓의 푸른 천정이 떠올랐다.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던 그 책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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