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의 종이책

Ep.09. 디렉

by 그레용

감정의 골은 이모션피크로 이어지고 있었다.


제각기 다른 모양의 감정이 흐르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는 디렉.


투박하게 행동하지만 섬세한 손길로 그들을 보살피고 있는 디렉이 보인다.


그가 지키는 건 뭘까?

감정의 바다를 관리하는 로봇. 그저 로봇인데. 몰리는 그를 통해서 무엇을 지키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오래전 개발된 사물인터넷 기반의 뇌신경회로 원격제어 시스템은 실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인간들은 시간이나 장소, 물리적 제약 없이 심지어 자유의지마저도 통제받기를 원했다. 그게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방법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무섭게 뻗어가는 기술력을 따라가기 버거운 나의 감성은 아주 낡고 쓸모없다고까지 생각해 왔다.


물론 이성적인 판단이 인간성을 지킬 수 있다는 말에는 공감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늘 답답하고 괴로운 건 한 가지였다.


손끝으로 책장을 넘기고, 잘 안 넘어가면 침 발라 넘기며, 책장 넘어가는 소리를 듣고, 저마다 다른 책의 무게와 질감을 느끼며, 책에서 풍기는 냄새로 세월을 느낄 수 있는 종이책에 나는 늘 압도당했다.


'인간의 감정으로 만드는 종이책이라니! 그래! 종이책 감성, 인간 정서에 가장 가까운 전자책을 만드는 건가?’


내 추리가 끝나갈 무렵, 디렉이 부푼 주머니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분명 이 안에는 감정의 조각들이 있을 테지.'


'네, 맞아요.'


'당신도 맘이 들리는군요.'


아랑곳하지 않고 디렉은 이어 말했다.


"네, 감정의 조각은 지구로 보면, 눈의 결정체와 비슷합니다."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는 그것.

언젠가 사람이 내뱉는 감정의 말에 따라 눈의 결정체가 변한다는 글을 읽은 게 생각났다.


"나는 이제 종이를 만들어야 합니다."


나는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충분히 하지 못한 채 짧은 인사만 건넬 수밖에 없었다.


몰리와 마켓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퍼시가 달려왔다.


"그래서요? 황홀한 감정의 바다는 어땠어요?"


"아직, 보지 못했다는 건가요?"


"예, 전 그 단계가 아니라, 직접 보진 못했어요."


공감 로봇 퍼시는 역시 수다가 많은 로봇이다. 네모난 얼굴이 쉼 없이 꿈틀대고 눈에는 별자리들이 수도 없이 반짝이다 사라진다.


그새 또 정이 든 건가.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감정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 난 떠나기 싫은 감정을 누르며 몰리의 배웅을 받았다.


테이트 모던 6층 카페에서 보이는 템즈 강 위로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난 부장의 부탁으로 펭귄북스의 마케팅 담당자를 기다리고 있다.


‘홀로’를 꺼냈다.

화면에 B612가 쓰인 플랫 캡 모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 옆으로 디렉이 준 제목 없는 책이 보인다.


빈티지 마켓의 주소인 줄만 알았던 B612 행성 그리고 감정의 바다.

종이책을 읽다가 혼령이 된 사람들.

다시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확신이 되지 않기를 난 바라고 있다.


오히려 낯설어진 세상이 템즈 강 언저리로 보랏빛 노을 끝자락을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곁에 선 낯익은 얼굴, 빈티지 마켓 주인 몰리였다.


내 손에 들려있던 리더기가 반짝였다.

그리고 디렉이 준 책 표지에 ‘메시지’라는 글자가 쓰였다.


"홀로!"


[네, 아라]


홀로의 소리는 마치 디렉의 음성처럼 내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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