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8. 이모션피크
허상이 현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건 참 오랜만의 경험이다.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러면 나는 고요해진다.
고요해진 그 바닥에 앉아 검지와 엄지로 종이를 고른다.
책장이 넘어갈 때 스치는 감촉, 스타락 거리는 소리.
글자들을 눈에 담으면 어떤 순간엔 옹알거리며 글자를 흉내 내는 내가 느껴진다.
존재의 의미는 인내심을 갖고 들여다보아야 보인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눈으로만 글을 읽어 내리는 것은 사이보그 식이라고. 이게 영 내 기질엔 맞지 않는다고 느낀 건, 어이없게도 그와 이별한 그날이었다. 난 내 방식으로 살기로 한 것이다.
B612에서 ‘캐번’은 특별한 곳이 아니었다. 행성의 별명 같은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디렉이 캐번에서 보자고 한 말은 둘러보고 있으라는 의미에 더 가까웠던 거다.
슈우우우 휘이이 후우~
"어? 이 소리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소리.
나를 이모션피크에 빠지게 만든 그 소리였다.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무릎을 모으고 앉은 모습, 두 팔을 위로 올리고 누워있거나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모습,
그런데 사람들 손에는 디렉이 내게 주었던 그 책이 모두 쥐어있었다.
그리고 가느다랗고 굵은 다양한 질감의 천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
언젠가 강원도 동굴에서 기괴한 석순을 처음 보던 느낌이랄까.
정확히 옷감의 표현은 맞지 않았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그건 그 속도대로 흐르고 있었다.
몰리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감정이었다. 이질적인 그것은 푸르게 출렁이는 이모션피크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종이책에 빠져 살다 인간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급기야 일명 부작용이라고 부르는 빠른 노화 증상으로 인해 이곳에 꽃이 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B612 행성에 어린 왕자가 지키던 장미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 내게 손짓을 했다.
"아라! 저기에 디렉이 있네요."
몰리가 알려준 곳에 디렉이 보였다. 그는 그들과 대화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잠을 자야 합니다."
어디서 들은 것 같은 말투.
다가가던 내 걸음이 갑자기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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