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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Mar 29. 2022

교복


십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6년 다닌 학교를, 활기 넘치던 마지막 교실을 온라인 화상회의 졸업식을 통해 떠나 보냈습니다. 좋은 시절을 좋은 줄 모르고 누려온 나라서 이 해프닝이 더욱 기막히게 느껴지는 걸까요. 통신망을 거쳐 조금 늦게 전송되는 오디오처럼 아이의 슬픔도, 기막힘도 시간차가 있었는지 치킨 점심이며 마카롱 후식까지 잘 먹곤 카톡 화면 만지작거리며 조금 섧게 울더군요.


살면서 잘 부탁한다는 말조차 쓰지 않던 내가 아이 낳고는 고맙다, 미안하다를 달고 삽니다. 기막힌 사태 앞에서 뚫고 나갈 대책은 강구하지 못한 채 위로의 말이나 찾는 나 자신이 종종 한심스러웠습니다. 그 열패감이 이제와 즐거운 일까진 못 되어도 견디는 정도는 되고, 그보다 내 딸의 눈물을 멈추게 하는 게 우선이어서 나는 새로 맞춘 녀석의 중학교 교복을 얼른 찾아옵니다.


녀석은 그 감색 치마 정장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축성이 없어서 기지개도 맘껏 켜기 어려운 자켓과 생전 입어본 적 없는 H라인 스커트에, 목울대까지 단추가 잠기는 블라우스와 단단한 넥타이를 설레며 기다리더군요. 사이즈 재러 함께 교복점에 간 날, 나는 탈의실에서 나온 아이에게 멋지다는 말을 첫 마디로 들려주지 못했습니다. 어깨 선이 들떠서가 아니라 그저 너무 이상하게만 보여서 빈말로라도 옷 태를 칭찬하지 못했습니다. 난처한 듯 미간을 찡그리고 선 엄마 대신 가게 주인이 환호를 해주자 그제야 아이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쳐다보더군요. 한 박자 늦게 근사해 보인다는 둥, 사진을 찍자는 둥 부산을 떨었지만, 글쎄요. 이마 주름은 옳게 펴져 있었을까요.


좁쌀만한 아이 젖니를 받아 들고 꼭 그만큼 아이와 멀어진 듯한 기분에 가슴 뭉클해지더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교복이라니요. 내 어깨 키를 넘긴 한 여성이 저기 저만큼에서 유니폼을 차려 입고 서있네요. 햇빛 아래 신나게 놀지를 못해 허여멀금한 얼굴에, 그보다 더 멀건 미소를 짓고 엄마에게 긍정을 재청하며 바라보네요. 마치 걸음마하다 넘어진 아이가 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엄마 표정을 살피는 것처럼요.


저는 웃었습니다. 그리고 말해주었습니다.


아가. 너의 슬픔은 하루 지난 마스크와 함께 버려 버려라. 너의 기쁨은, 너의 설렘은, 심지어 너의 낙담조차도 이 교복과 함께 다가올 달력 뒷장에 펼쳐져 있단다. 새 교실에서 다시 웃으렴. 마스크에 가려 빙그레한 입매 보이진 않겠지만 친구들과 새로이 즐겁고 슬프고 한탄하거나 용기 내어라. 그 사이 엄마는 세상을 향해 잘 부탁한다 조아릴게. 어쩔 수 없는 걸 견디고,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너의 교복 셔츠를 빳빳이 다려놓을게. 우리 딸 졸업 축하한다. 암, 축하할 일이지. 6년어치 수확한 종자 주머니와 노하우가 생겼잖니. 그걸로 새 봄에 새로이 파종하면 신나는 일 많을 거야. 건강하게 졸업해줘서, 이 이별이 슬프게 여겨질 만큼 그동안 즐겁게 지내줘서 정말 고마워.


맞춘 옷은 아이에게 잘 맞더군요. 무릎 아래로 약간 내려온 스커트 길이만 반 뼘 줄여 주었습니다. 투명한 스타킹 신은 종아리가 반짝반짝 더 경쾌해 보입니다. 예전 학교가 가까워서 등교 길에 친구들을 많이 만난다며 안 깨워도 잘 일어나 아침 먹고 뛰어갑니다. 어떤 날은 학원 시간이 물려 저녁까지 교복 차림인 적도 있는데,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구름 위를 나는 승무원마냥 상냥합니다.


조금은 애잔했을 내 눈이 그래도 웃고는 있었나 봐요. 그 얼굴 보고 아이가 따라 웃으니 말입니다. 웃어도 된다고 엄마 얼굴이 말하고, 그럴 줄 알았다고 아이 얼굴이 듣습니다. 학교장 재량 따라 교문 닫는 곳도 있다는데, 해서 새 교복이 옷걸이에 걸린 채 먼지 쌓이는 집도 있다던데 그 불편한 자켓이나마 차려 입고 나가는 게 어디니. 아이는 말 안 해도 다 듣습니다.


남편이 먼저, 한참 뒤 둘째가, 기어이 나까지 코로나 확진을 받아 격리할 동안 저 어엿한 큰 애만큼은 외가에 보내 안전하게 등교를 시켰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가 모여 아이의 자그만 넥타이를 구경했고, 큼지막한 구두를 돌려놓아 신고 나가기 좋게 했다지요. 마침내 보름 만에 다시 만나니 열 다섯 날만큼 자란 건지, 어린이와 청소년 사이만큼 자란 건지 여하튼 껑충 하네요.


교복 덕인가 하여 나도 한 번 몰래 입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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