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세계 2

2장 이기적 세계

by 은졍



※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학교폭력, 가정폭력, 성폭력 등)







2장. 이기적 세계





중간층, 혹은 고층의 가정집. 아직은 할머니가 나를 좋아하던 노란 세상이다.


아이의 작은 체구 쯤 수용하는 너른 거실. 큰 소파, 무늬 없는 민 벽지와 푸르렀을 베란다의 하늘, 화소가 낮은 어느 옛적.

내 옆자리에 샛노란 엄마, 내 앞자리에 샛노란 할머니. 고요했다. 나는 우유를 마시며 갓 자라난 짧은 다리를 네 번 정도 흔들다 마는 아이였다.


아이들은 그 즈음, 세상 모든 일이 다 자기 것이라는 귀여운 착각 속에 산다고 한다. 나 귀여운 아이였나?

나는 빈 우유컵을 탁자에 놓았고 할머니는 우물쭈물 무언가 말했다.

엄마가 버럭 고함을 쳤다. 나 너무 놀랐다. 다리를 가지런히 모았다.

탯줄만 끊은 아이였던 나, 눈치를 보는데 눈치를 몰랐다. 우유컵만 만지작댔다.


엄마가 물었다. ”엄마가 우유 좀 더 줄까?”

나는 새로운 우유를 마셨다.

그렇지만 엄마는 할머니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엄마는 빳빳이 고개를 세웠다. 할머니는 익은 벼처럼 고개 숙였다. 나는 우유컵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엄마는 내 우유컵을 집어 들었다.


고개 숙인 할머니의 얼굴에다 대고 우유를 확 뿌려버렸다.


초라하고 슬픈 할머니의 얼굴이 우유 범벅이 되었다. 그 노란 안경에도 바지에도 모두 묻었다. 할머니 울지 마세요 말하면 다시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내가 괜히 우유를 달라고 해서.


죄송해요.






-





할머니는 피부가 얇아서 멍이 잘 들었다. 멍은 보통 보라색 아니면 푸른색이었고 조금 검었다. 술을 마시고 그 멍을 만드는 존재가 안방에 있었다. 나는 사람이 아닌 존재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면 할머니는 사람이라는 말이 되는 걸까.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할머니가 웅크려 누워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아이가 뒤에서 안아주었다. 그게 다였다. 솔직히 나는 그런 사람한테 잘해주고 싶지 않았는데, 사람이 우니까 다독였다. 미친년, 도둑년이라는 욕을 그대로 돌려줄 수도 있었지만, 빼앗은 용돈을 되돌려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나쁜 마음은 갖지 않기로 했다.

안고 있으면 할머니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늦었으니 얼른 자라고 하는 사투리를 썼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실눈을 뜨면 등에도 큰 멍이 있었다. 눈을 꾹 감아버리면 캄캄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도둑년“


“창녀”라는 말도 들었다. 나쁜 말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가끔은 너한테는 물세가 아깝댔다. 샤워를 못하고 학교에 가야 하는 날이 생겼다. 더러워졌다.

학교에서 애들이 피하고 많이 놀렸다. 내가 화를 내자 남자애 하나가 다가와 발로 세게 찼다.

속옷 밑으로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아이들은 콜로세움처럼 구경했다. 웅성대는 소리.

조금 보다가, 해산하는 발소리. 도와주는 어른은 없었다. 나는 몸을 안고 울었다. 일어났다. 집에 가야지.



할머니는 베이비 로션을 줬다.

알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왜 우냐고 물어보니까 그냥 알려줬다.

그랬더니 바르라고 나한테 줬다.

그걸 건네주고 나서, 바로 안방으로 돌아가 할머니는 할아버지하고 텔레비전을 봤다. 드라마 같았다.






후회한 적 없었는데. 아플 때 안아드린 거. 너무 표정이 슬픈 것 같으면, 할머니 재밌는 이야기라고 들려드린 걸. 어깨 결린다는 말 하지 않아도, 알아서 가서 주물러 주고 있었던 것도. 흉진 곳을 홀로 자책하고 있으면, 억지로라도 아니라며 옆에서 고개 저어주었던 것. 뭐 딱히 해줄 말은 없었지만.






인기척에 눈꺼풀을 비볐다. 할머니는 내 품에서 벗어나 있었다.


새벽 네다섯 시 쯤이었던 것 같은데. 할머니는 우유를 꺼내 마셨다. 냉장고 불빛, 나는 다시 자는 척을 했다. 혹시라도 옆자리에 오면, 팔이 풀린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라고. 일부러 안지 않는 거 아니라고. 할머니는, 그날 다시 내 옆자리로 와 좀 더 잤다. 안방에는 유령이 있겠지. 나는 잠시 그 어둑한 세계가 우리의 이부자리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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