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주심

by 관지

몇 해 전, 성원기교수님이 주관하시던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길에 참여한 적이 있다. 특별히 탈핵 운동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걷는 걸 좋아하는데 함께 걸을 사람들이 있으니 따라나선 거였다.


성교수님은 예전 내가 작은 도서관에 근무할 때 강사로 와 주셨는데 그 쉽게 풀어내는 탈핵에 관한 내용과 소탈한 웃음과 담백한 성품이 좋아서 담박 팬이 되었다. 그 순례길에 몇 번이나 갔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런데 그 경험이 의도치 않게 내 삶을 바꿔놓았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성교수님 자체가 행동하시는 분이라 말씀이 별로 없으셨고 그러니 들은 것도 별로 없는데 더구나 누구에게 자기를 과시하며 영향을 미칠 열의도 없으신 분인데 내가 뭔가 달라진 것이다.


나는 늘 결핍과 궁핍 속에 살았다. 어쩌면 내 신앙이라는 것도 없으니 언젠가는 채워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그 순례길을 다녀온 후 내 눈은 없다에서 많다로 시력교정이 되어 있었다. 내 집을 둘러보면 뭐가 이렇게 많은지. 어떻게 하면 덜어낼까를 나도 모르게 궁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 없이 살기는.


예전에는 서프라이즈 이런 걸 좋아했다. 은근 기대하기도 하고 그렇게 놀라게 하고 그 모습을 즐거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단연코 거부한다.


내 가까운 지인들은 서로 물어본다. 혹시 내가 이거 주고 싶은데 받아줄겨? 그래서 내가 주고 싶다고 아무 때나 아무 거나 주는 것 안 한다. 왜냐하면 필요하지 않은 것을 집에 두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이 소유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없을수록 부러워한다.


얼마 전에는 친구가, 그 친구는 자기가 쓰고 좋은 게 있으면 사람들에게 막 사주고 싶어 하는데 커피머신에 꽂혀서는 사 주겠다고 사정을 해서 나도 사정을 했다. '지금 말고 혹시 나중에 필요하면 꼭 너에게 말할게.'


늘 채워주실 것을 기대하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를 채워주셨다. 감사.



매거진의 이전글쌀독을 채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