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결혼 후에 찾아온 연애 감정이었는데 나는 그가 고향 사람처럼 반가웠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던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집중해서 들어주었고
특히 행간을 알아채는 사람이어서 대화가 편하고 즐거웠다.
나는 들이대는 쪽이었고 그는 방어하는 쪽이었는데 사실 그 역할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무모하지 않았고 오히려 신중으로 포장된 영악함도 있었기에
만일 그가 들이댔다면 내가 방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이즈음에 갑자기 이 오래전 인연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그리워서도,
궁금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가 했던 이 말 한마디 때문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만큼만 해야지'
내 인생이니까 내 맘대로 살겠다고 무슨 독립투사 나신 것처럼 소리 질러대는 이 세상에서
그래도 한 발짝만 물러서 눈을 돌려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허락하심,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허락하심이 바로 안전지대임을.
내가 이 낯선 곳에 들어와 사계절을 두 번 지나면서도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외롭지 않았던 것은,
그러니까 마음 편히 지낼 만했던 것은
순전히 이 허락하시는 만큼이라는 가이드라인 속에서 살고 있는 섬 주민들 덕분이다
이곳 섬에는 80대 두 분, 70대 세 분, 그리고 60대 막내인 내가 살고 있다.
처음 올 때만 해도 가장 어르신인 80대 할머니가 한 분 더 계셨는데
건강이 안 좋아지시면서 목포로 나가셨다.
일주일에 세 번 투석해야 하니 더 이상 섬에 있기가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나하고는 한 6개월을 함께 살다 가셨는데 그때 놀라웠던 것은 이들의 반응이었다.
나가시는 분도 바로 얼마 전까지 심고 거두고를 평생 할 것처럼 바지런을 떨었지만,
일말의 미련도 없이 나에게 텃밭을 넘겨주고 나가셨고,
보내는 이들도 곧 다시 돌아올 사람처럼 웃으며 손 흔들어 주었다.
모두 다 이곳에서 반평생을 넘게 살아오신 분들이니
삶의 이력은 물론이고 표정만 봐도 서로의 속내를 알 수 있는 혈연보다 더 가까운 사이임에도
이들은 서로 담담했다.
지나고 보니 우리는 그 흔한 송별회 같은 것도 없었다.
내가 슬쩍 그 빈자리를 들추며 아쉬움을 털어놓아도 '뭐 인생 다 그런 거지' 하는 달관의 분위기였고
그들이 굳이 아쉬움을 말하지 않는 그 근저에는
'다음은 혹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심리적인 채비가 있음을 조금 더 지나 알게 되었다.
물론 이 섬이 처음부터 이렇게 대여섯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은 아니었다.
한때는 이곳에 멸치어장이 있었고 많은 배들이 들락거리며 덕분에 부자 동네라는 소문도 들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도 있었으니 아이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을 떠나보내며 그 떠남이 언제든 나일 수 있다는 이 현실적 자각이
몸에 밴 것이다.
몸이 아프면,
(이들에게 몸이 아프다는 건 의식을 잃거나 나 혼자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지금도 늘 몸은 아픈 중이지만 이런 건 아픈 축에 끼지 못하니까)
내가 평생 살아온 이곳, 내 살림살이를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한다는 이 현실을
이들은 잊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는다.
비단 이분들뿐 아니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운명에 대한 실존적 자각은
어쩌면 이 섬이라는 자연이 주는 가장 큰 혜택이고 선물인 것 같다.
이들에게는 '허락하신 만큼'만이 곧 삶의 호흡이고 흐름인 것이다.
그래서 고기를 잡으러 나가서 빈 배로 들어와도 이런 날도 있제, 하며 웃을 수 있고,
비바람이 몰아쳐서 일주일이 넘게 세상과 단절되고 고립이 되어도,
그래서 내가 세운 계획이 부서지고 무너져도 어쩔 수 없제, 하며 순하게 받아들인다.
자연에 홀리는 것도 한때임을 나는 이곳에 와서 알았다.
창문만 열면 눈에 들어오는 바다와 대숲 바람과 파도 소리,
날마다 요염하게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했는데, 한두 해 지나다 보니 어느새 시들해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가끔씩만 '어, 그래 너 있었구나, 반가워'하며 영혼 없는 멘트를 날리곤 하는데
대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사람이다.
이 분들을 보면 어쩌면 자연 속에 산다는 것은 그저 눈 호강이나 하고 잠깐 바람이나 쏘이며 기분 전환하는
그런 입가심의 차원이 아닌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 자연化 시키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이곳은 사람에게서도 자연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