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박한 조급증
카페에서 충전을 부탁한 핸드폰의 충전시간을 생각 없이 무감하게 견디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살붙이처럼 생각하고 수많은 애정의 시선을 주는 것으로 부족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극히 곡진하다.
부탁하고 돌아선 지근거리가 마치 영원한 이별의 끝에서 속삭이는 연서처럼 그 기다림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급속충전해도 한 시간은 걸린다 그 시간을 절대로 온전하게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는 핸드폰이 생명만 부지하고 있으면 될 일이다. 그만 달라고 할까? 무슨 연락이라도 와 있을까? 고개는 이미 카운터를 향해 여러 번 오고 갔다. 가지러 갈까? 말까? 주세요 할까? 말까? 조급해진다.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으로 가득하니 이곳에서 나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방인이다. 환경이 낯설고 행동이 부자연스럽다. 굽은 목이 나만 꼿꼿하다.
충전기를 챙겨 나오지 못한 준비성 없음을 탓한다. 아니 지난밤에 충전하지 못한 자신의 게으름을 탓해 본다. 하지만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를 찾고 있으니 지나간 자리가 보일리 없다.
출근길에 문 앞까지 마중 나와 통곡하는 아이처럼 신경이 쓰인다. 거기에 두고 떠나는 고통과 다르지 않다.
고개 돌려 다짐하는 아픔과 다르지 않을까 싶다. 충전을 부탁합니다 는 십 분 전이다.
그 시간을 무감하게 견디어 내지 못하는 것이 빨리 먹은 콩밥 똥 눌 때 보자는 식이니 참 성급하기 짝이 없다. 십 분이다. 핸드폰은 살다가 말았다 절전 모드로 전환해서 최대한 생명을 연장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핸드폰뿐일까? 우리가 산만하고 부산스러운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다. 돌아보면 조급함도 성급함도 어쩌면 변화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일까 싶다.
쓰기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나가고 있다. 나의 조급증과 병적인 강박은 다시 나를 꼬드기고 있다. 그렇게 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충분하지 않을 것이고, 결코 준비가 되기를 기다려 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말하는
조야스러운 말투로 의미 없는 내밀함을 더할 뿐이다.
다만 그렇게 하더라도 즐거움과 행복한 꿈이 변질되는 것을 눈뜨고 바라보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핸드폰과 내가 다른 것을 증명해 내는 풀이 방식을 찾아야 한다. 풀이 방식이 답을 찾지 못해도 상관없다.
피천 한입 없는 처지에 있어도 애쓰는 마음이 함께 해야 한다는 명분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참깨 들깨 노는데 아주까리처럼 보여도 또 한 번 부끄럽지 않은 마음을 간직하고 싶다.
십 분을 기다리지 못하는 천박한 조급증을 용인하고 용서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지만 세월 속에 내리 눌린 선명한 마킹은 쉽게 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명분은 늘 아름답지만 가끔은 착시를 일으킨다고 했던가? 하지만 자신의 명분만으로 아름다운 것은 그대로 늘 아름답고 또 아름답고 싶다. 수많은 착시 속에 있어도 말이다.
자신의 불편한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그렇게 하고 싶은 행위는 늘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싶다. 과한 욕심이 때때로 부끄럽고 비루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바뀔 때 젊은것이다. [ 이적의 단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