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일본 영화의 경향은 ‘산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옴 진리교와 3.11 대지진, 이전 히로시마 원자 폭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영화들은 관객에게 삶의 방향성을 제시한다기 보단 이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며 꿋꿋이 살아보자를 외치는 것 같다.
우리는 남겨진 사람들에게 어떠한 얼굴을 바라는가? 슬픔에 못 이겨 울부짖는 표정?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해 방황하는 삶? 만일 현대 일본 영화들이 단순히 이런 관습적인 사고로 사람들과 상황들을 그려냈다면 그 영화들은 전시에 그치지 못했을 것이다. <아사코>(하마구치 류스케)가 예측할 수 없는 지진 속에서 사랑을 그리는 것과 <두더지>(소노 시온) 속 모든 스미다에게 외치는 응원, <유레카>(아오야마 신지)의 남겨진 자들의 여정 등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관습에서 벗어난다. 아즈마 히로키가 이야기하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다크 투어리즘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그곳에 역사를 멈춰선 안된다. 그것은 곧 공간을 프레이밍 하는 것과 같으며 그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일차원적으로 사고하는데 그치게 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 같이 <바람의 목소리>는 3.11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가족이 사라진 인물(하루)을 다룬다. 이 영화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카메라의 태도와 깊이, 인물들을 연출하는 방식이 굉장히 정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일반적인 로드 무비의 개념을 따르는 것이 아닌 뺄셈의 여정에서 드러나는 우연성을 통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뺄셈의 여정
하루의 여정은 히로시마에서 같이 살던 숙모가 쓰러진 후 우연히 시작된다. 이미 쓰나미로 가족들이 휩쓸려간 하루에게 삶은 버텨내는 것이었다. 그 버팀을 지지해 준 숙모까지 쓰러지자 하루는 삶의 회의와 울분에 못 이겨 어느 공사판에 누워버린다. 이런 하루를 우연히 코헤이가 발견하며 집으로 데려오게 된다. 코헤이 역시 호우로 인해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라고 말하며 할머니 또한 원자폭탄 이야기를 하며 과거를 돌이킨다. 코헤이는 살아있으면 먹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들에게 삶은 우연과 생존으로 귀결된다. 재난 속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고 살았기에 더욱 잘 살아나가야 한다. <바람의 목소리>에서 이루어지는 여정들은 모두 공통점을 갖게 되고 치유의 컨벤션을 지워나간다는 점이 흥미롭다. 코헤이의 대사(살아있으면 먹어야 한다)는 하루의 모든 여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유우카 남매와의 여정에서도, 모로이의 구출 속에서도. 그들은 살아가야 한다. 일반적인 로드 무비의 개념을 따른다면 인물이 움직이며 같이 동행하는 덧셈의 여정이 되겠지만, <바람의 목소리>의 하루에겐 우연한 만남과 희망, 연대가 존재할 뿐 그녀에게 더해지는 인물은 없다. 오롯이 같이 먹고, 공간을 공유하며 같이 살아갈 것을 약속하고 사라지는 뺄셈의 여정이 되는 것이다.
유령적 존재
오랫동안 들어가지 못한 모리오의 집에서 하루가 가족들을 만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과거에 대한 재현인지 단순히 하루의 환상 숏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탱탱했던 공에 바람이 빠지고 바람의 소리가 이미지에 일치되는 순간 우리는 현실을 직면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마치 유령이 다녀갔던 공간을 보여주는 것처럼 집 안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하루의 뒷모습을 좇는다.
이 불확실한 존재는 영화의 말미에 한 번 더 등장한다. ‘바람의 전화’라는 죽은 사람과의 소통을 하기 위해 떠나는 소년은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인물이다. 그리고 하루의 여정 속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다. 하루는 소년을 따라 같이 바람의 전화로 가게 되고 그곳에 도착한 소년이 먼저 아버지에게 말을 전한다. 영화는 이때 소년의 뒷모습과 그가 말하는 목소리를 온전히 전달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로소 하루가 전화 부스로 들어갈 때 여지껏 잘 비추지 않았던 하루의 얼굴을 카메라가 흔들림에도 끊어지지 않는 긴 롱 테이크를 유지하며 보여준다. 하루가 쌓아왔던 목소리를 토해내고 부스를 나서는 순간 소년은 사라지고 없다. 실체 하지 않는 인물인 것인지, 인사 없이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개인적인 감상은 전자에 가깝다. 소년은 하루의 마지막 여정 속에서 종착지를 동행하며 목소리를 내뱉게 한 유령의 존재인 것일까?
사실의 개입/ 다큐멘터리- 허구의 경계
<바람의 목소리>가 극과 다큐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카메라가 실제 공간과 인물을 조망하는 것에 있다. 먼저 모리오를 만나며 쿠르드족과 밥을 먹는 장면의 연출은 허구의 극 영화에서 사실(난민)이 개입하게 되며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띄게 된다. 이는 구금된 난민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이들의 목소리는 대사의 일부라기 보단 실제 그들의 소리를 내뱉는 것 같다.
또한 후쿠시마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역시 극의 경계가 무너지는 쇼트가 있다. 이전까지 차를 타고 가는 여정들의 카메라는 모두 차 밖이나 안에서 공간 안에 있는 인물들의 얼굴과 상황을 좇을 뿐이었다. 하지만 후쿠시마로 가는 중 카메라는 갑자기 밖의 풍경을 담아낸다. 이 순간 이질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지금껏 진행해왔던 극 영화의 패턴과 내러티브의 명확한 사실의 풍경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하루와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히로시마 폭탄, 호우 피해, 난민, 후쿠시마 원전 등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재난 속 피해자들을 만난다. 이들은 물론 외부자(관객)의 시선에선 허구의 인물이지만 우리는 이를 단순히 허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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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목소리>는 히로시마에서 출발해 오츠치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히로시마 역사를 걸쳐 현재 난민 문제까지 도달한다. 스와 노부히로는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프레임을 씌우지 않는다. 이들을 살기 위해 먹을 것이고, 새 생명을 낳아 살아가고, 다시 그 공간을 마주하며 살아갈 수 있다. 더해지지 않는 여정 속에서 하루는 결국 혼자가 되겠지만 그들은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응원의 목소리를 전한다. 마지막 여정에서 하루는 가닿지 못할 가족에게 목소리를 전하고 이는 디제시스 소리를 넘어 영화 밖 관객들에게 닿게 된다. <바람의 목소리>는 온전히 하루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닿는 순간까지, 같이 잘 살아보자는 응원과 연대로 울려 퍼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