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기계음과 소음들, 미친 듯이 돌아가는 기계들과 움직이는 광부들. <아라가네>는 빛이 한 줌 없는 지하에서 노동하는 광부들을 쫓는다. 지상에서 지하로 도착하게 된 카메라는 한 광부와 함께 레일을 타고 움직인다. 레일을 타고 더욱 깊숙한 동굴로 들어가는 과정은 체험의 형식을 갖게 된다. 카메라는 광부들의 눈과 같다. 암흑의 공간에서 우리는 광부들이 지닌 랜턴 빛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카메라가 비추는 이 모습은 곧 스크린에 투과될 이미지의 형상이 된다. 광부들은 일하기 위해 움직인다. 광부들의 움직임은 다시 빛의 움직임과도 연결된다. 즉,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미지의 프레이밍은 광부들의 빛(움직임)으로 만들어진다.
헤드램프의 빛으로 보이는 탄광의 공간 속에는 노동의 땀과 잘 보이지도 않는 광부들의 얼굴들, 그들의 목소리가 묻어난다. 오다 카오리는 이 탄광이 마치 땅 속에서 펼쳐지는 우주 같다고 하였다. 이 이차원의 우주 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검은색 화면 속에서 온전히 그들의 노동이 느껴진다. 이는 단순히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일차원적인 이미지가 아닌 현실 밖으로 연결되는 초월성을 갖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우연은 카메라나 연출자가 생각하지 못한 상황을 직면할 때 스펙터클이 되지만 <아라가네>가 마주한 우연성은 광부들이 지니는 빛과 언제 일어날지 모를 사고일 뿐이다. 지하 속에서 그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몇 없는 대사 속에 이들은 말한다. 지하의 공간에서 일하면 지상에서 일을 할 수 없다고. 이들에게 어둠은 투쟁이자 터전이다. 레일이 다시 동굴 밖으로 나가며 카메라는 지상 위로 올라간다. 검은색의 동굴의 모습과 완전히 대비되는 외부의 모습은 하얀 눈이 쌓여있다. 광부들은 일하기 위해 밖을 나선다. 하지만 이들에게 외부(동굴 밖)는 거의 경유지에 그친다. 그들은 다시 지하로 내려간다. 광부들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면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없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탄광으로 내려가는 도중 끊어진 영화처럼 이들의 안전은 우리가 알 수 없다. 오다 카오리가 말한 우주는 어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이들의 신변을 이야기한다. <아라가네>는 광부들의 우주를 같이 체험하며 어둠의 아름다움과 동시에 위험을 느낀다. 어쩌면 <아라가네>는 탄광의 공간을 마주하기 보단 이들의 삶을 지켜달라는, 지상에서 아래를 한 번 봐달라는 신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