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깡통전세의 확산
2023년 3월,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다세대주택 앞에 경찰차가 몰려들었다. F 씨(32세)가 전세사기 신고를 한 것이다. 보증금 1억 2천만 원을 맡기고 2년간 거주했던 집, 계약 만료와 함께 집주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F 씨가 뒤늦게 확인한 집값은 8천만 원. 그의 전세보증금보다 4천만 원이나 낮았다.
F 씨는 혼자가 아니었다. 서울시 전세분쟁조정위원회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서울에서만 전세사기 피해 신고가 수천 건을 넘어섰다. 전국 기준으로는 수만 명이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루 평균 수십 명씩 전세사기 피해자가 발생한 셈이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피해 규모였다. 정부 집계에 따르면, 전세사기 피해 총액은 수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서울시 한 해 예산의 상당 부분에 해당하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평균 피해액은 1인당 1억 원대. 대부분 서민들의 전 재산이 한순간에 증발한 것이다.
전세사기는 더 이상 일부 지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강서구, 양천구 등 서울 서남권에서 시작된 피해가 점차 강북구, 노원구, 도봉구 등 서울 동북권으로 확산되었다. 심지어 강남구 일부 지역에서도 전세사기 사례가 보고 되기 시작했다. 서울 전역이 전세사기의 위험지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덜 위험한 물건'을 고르는 시장의 탄생
전세사기가 확산되면서 서울의 전세시장은 기괴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세입자들은 더 이상 '살고 싶은 집'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덜 위험한 물건'을 고르는 시장에 내몰렸다. 부동산 중개업소에서는 집 소개보다 '안전성 체크리스트'가 더 중요한 서비스가 되었다.
서울 마포구의 부동산 중개업소 대표 G 씨(51세)는 요즘 고객들에게 집을 소개할 때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있다. "이 집 집주인은 빚이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질문이 이제는 필수가 되었다. 집주인의 재정 상태, 다른 소유 부동산의 담보 설정 현황, 심지어 개인 신용도까지 확인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세입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깡통전세'였다. 집값보다 전세보증금이 높거나 비슷한 수준인 경우를 가리키는 이 용어는, 2023년 서울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 중 하나가 되었다. 서울시 부동산 실거래가 분석 결과, 전세 물건 중 상당 비율이 깡통전세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깡통전세의 위험성은 단순했다. 집값이 1억 원인데 전세보증금이 1억 2천만 원이라면, 집주인은 세입자의 보증금을 돌려줄 능력이 없다. 집을 팔아도 보증금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결국 세입자는 보증금을 잃거나, 집주인이 추가 대출을 받을 때까지 무한정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보증금 1억 원 이하 주택의 함정
전세사기의 주요 타깃이 된 것은 보증금 1억 원 이하의 소액 전세였다. 2023년 서울 전세사기 피해 사례를 분석해 보면, 전체의 70% 이상이 보증금 1억 원 이하 물건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대적으로 서민층이 많이 거주하는 이 구간이 사기꾼들의 주요 사냥터가 된 것이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 양천구 신정동, 구로구 구로동 등 서울 서남권 지역이 특히 위험했다. 이 지역들의 공통점은 다세대주택과 연립주택이 많고, 보증금 6천만 원~1억 원 사이의 소액 전세가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젊은 신혼부부나 사회초년생들이 선호하는 조건이었지만, 동시에 전세사기범들이 노리는 조건이기도 했다.
사기 수법은 점점 정교해졌다. 과거에는 가짜 등기부등본을 만들거나 허위 신분증을 사용하는 단순한 방법이 주류였다면, 최근에는 실제 부동산을 소유한 상태에서 여러 명에게 전세를 주는 '다중 임대' 방식이 늘어났다. 한 집에 3-4명의 세입자가 각각 다른 전세계약을 맺고 보증금을 입금하는 방식이었다.
서울 노원구에서 발생한 한 사례를 보면, 실제 집값 8천만 원짜리 빌라에 4명의 세입자가 각각 6천만 원씩 보증금을 맡겼다. 총 2억 4천만 원의 보증금을 받은 집주인은 이 돈으로 추가 부동산을 구입한 후 잠적했다. 4명의 세입자는 서로의 존재도 모른 채 각자 보증금 6천만 원을 잃었다.
전세금은 인질, 집은 함정
전세사기가 확산되면서 전세보증금의 성격 자체가 바뀌었다. 과거에는 '목돈을 맡기고 집을 빌리는' 개념이었다면, 이제는 '돈을 인질로 잡히고 집에 갇히는' 상황이 되었다.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집주인의 눈치를 봐야 했고, 집주인은 그 심리를 이용해 각종 부당한 요구를 했다.
서울 성북구에 거주하는 직장인 H 씨(29세)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전세보증금 9천만 원을 맡기고 들어간 지 1년 만에 집주인이 "집을 팔아야 한다"며 이사를 요구했다. 하지만 보증금 반환은 "매매가 성사된 후에"라며 미뤘다. H 씨는 새로운 집을 구하기 위해 추가 자금이 필요했지만, 기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이사조차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이런 상황은 전국적으로 수만 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시 전세분쟁조정위원회에 접수된 사건 중 상당 부분이 "보증금 반환 지연"에 관한 것이었다. 세입자들은 법적 분쟁을 벌이거나, 보증금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무기한 기다리는 세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상황이 세입자들의 삶 전체를 옭아맸다는 점이다. 결혼을 미루고, 이직을 포기하고, 창업 계획을 접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보증금이 묶여있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세보증금이 인생의 족쇄가 되어버린 것이다.
서울시의 대응과 한계
서울시도 전세사기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내놓았다. 2023년 '전세사기 피해지원 종합대책'을 발표하며, 피해자 지원과 예방책 마련에 나섰다. 보증보험과 협력해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상품을 출시하고, 전세 안전 체크리스트를 배포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책의 속도를 앞질렀다.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상품의 가입률은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보증료 부담과 복잡한 가입 절차 때문이었다. 집주인들이 가입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았다. "보증 가입하려면 전세 안 준다"는 집주인들 앞에서 세입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전세안심보증금대출'도 마찬가지였다. 저금리로 전세보증금을 지원하는 정책이었지만, 소득 조건과 주택 가격 제한 때문에 실제 이용자는 많지 않았다. 서울 전체 전세 거래 중 이 대출을 이용한 비율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근본적인 문제는 전세제도 자체의 구조적 취약성이었다. 집값 변동, 집주인의 재정 상황, 부동산 경기 등 세입자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너무 많았다. 서울시의 정책은 이런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사후 피해수습에 그치고 있었다.
전세시장의 신뢰 붕괴
전세사기의 확산은 단순히 경제적 피해를 넘어서 서울 전세시장의 신뢰를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서울시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무주택 세대주의 60% 이상이 "전세는 위험하다"라고 응답했다. 2020년과 비교하면 3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한 수치였다.
이런 불신은 전세 수요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졌다. 서울 부동산 관련 데이터를 보면, 2023년 전세 계약 건수는 전년 대비 30% 이상 감소했다. 반면 월세 계약은 40% 이상 증가했다. 세입자들이 스스로 전세를 기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동산 중개업계도 변화했다. 서울시 공인중개사협회 조사에 따르면, 중개업소의 70% 이상이 "전세 중개를 꺼린다"라고 응답했다. 전세사기 연루 위험과 분쟁 조정의 부담 때문이었다. 일부 중개업소는 아예 "월세 전문"을 표방하며 전세 중개를 중단했다.
금융기관들도 전세대출을 축소했다. 전세사기 증가로 손실이 커지자, 대출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고 한도를 줄였다. 2023년 서울 소재 은행들의 전세대출 잔액은 전년 대비 10% 이상 감소했다. 전세시장을 떠받치던 금융 지원마저 줄어든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새로운 형태
전세사기는 서울의 젠트리피케이션에도 새로운 양상을 만들어냈다. 기존에는 임대료 상승으로 인한 '가격 젠트리피케이션'이 주류였다면, 이제는 전세사기 위험으로 인한 '불안 젠트리피케이션'이 나타났다.
서울 마포구 상수동, 연남동 일대가 대표적이다. 젊은 예술가들과 소상공인들이 모여 살던 이 지역에 전세사기가 확산되면서, 기존 거주민들이 대거 떠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이 떠난 자리를 채운 것은 더 부유한 계층이 아니라 공실이었다. 전세 공급이 줄어들면서 지역 전체가 공동화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홍대 인근 서교동도 마찬가지였다. 2023년 한 해 동안 이 지역에서 발생한 전세사기는 수십 건. 피해를 당한 예술가와 프리랜서들이 서울을 떠나면서,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도 함께 사라졌다. 전세사기가 서울의 문화 생태계까지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법적 구제의 한계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가장 절망하는 부분은 법적 구제의 한계였다. 민사소송을 통해 손해배상을 받으려 해도, 사기를 친 집주인들 대부분이 이미 재산을 은닉하거나 처분한 후였다. 형사고발을 해도 집주인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접수된 전세사기 관련 소송 중 실제로 피해금을 회수한 비율은 20%대에 불과했다. 나머지 70% 이상의 피해자들은 법적 승소를 해도 실제로는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소송비용과 시간만 추가로 손해를 본 셈이었다.
전세사기 전담 수사팀이 구성되고, 전세사기특별법이 제정되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사후 처벌보다는 사전 예방이 중요한데, 예방을 위해서는 전세제도 자체의 구조 개선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쉽지 않은 과제였다.
전세사기 이후의 서울
전세사기의 확산은 서울 주거시장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전세는 더 이상 안전한 주거 선택지가 아니었고, 월세는 부담스러운 선택지였다. 세입자들은 '불안한 전세'와 '비싼 월세'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2024년 들어서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서울시 전세분쟁조정위원회에는 여전히 월평균 수백 건의 전세 관련 분쟁이 접수되고 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2차, 3차 피해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보증금을 잃은 후 신용대출로 새로운 전세에 들어갔다가 또다시 사기를 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전세사기는 이제 서울 주거시장의 고질적 문제가 되었다. 근본적인 해결책 없이는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였다. 전세제도가 만들어낸 이 거대한 함정에서 벗어날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씨앗은 있었다. 일부 젊은 세입자들이 전세와 월세가 아닌 제3의 선택지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주거 서비스, 투명하고 안전한 임대 시스템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었다. 과연 이들이 찾고 있는 답은 무엇이며, 누가 그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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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청년세대, 전쟁터에 내몰리다'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