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으로 스며드는 시간

집학사전-햇빛

by 이재준
"빛이 없는 건축은 건축이 아니다. 공간은 빛에 의해 비로소 살아 숨 쉰다."

- 루이스 칸, 『침묵과 빛』


어린 시절 외할머니 집 대청마루에 누우면, 처마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마루 위에 긴 띠를 만들었다. 그 빛의 띠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아침에는 동쪽에서, 오후에는 서쪽으로. 매년 여름방학 때마다 그곳에서 그림자를 따라 몸을 옮기며 하루 종일 놀았다. 햇빛은 그렇게 시간을 보여주는 시계였다.


집을 볼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햇빛의 방향이다. 향에 따라 집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남향집은 하루 종일 밝고 따뜻하지만 남서향은 다소 더운 집이 된다. 북향집은 안정적이지만 어둡고 차갑다. 동향집은 상쾌한 아침을 선사하고, 서향집은 낭만적인 저녁을 만든다.


햇빛은 공간을 변화시킨다. 같은 방이라도 햇빛이 들 때와 들지 않을 때가 완전히 다르다. 햇빛이 가득한 방은 넓어 보이고, 그늘진 방은 좁아 보인다. 햇빛은 물리적 크기를 바꾸지 않지만 심리적 크기를 바꾼다. 밝은 집에서는 마음도 밝아지고, 어두운 집에서는 마음도 가라앉는다.


비 오는 날의 희미한 햇빛도 특별하다. 구름 사이로 간신히 새어 나오는 빛은 평소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빛 좋은 날은 이불을 널면 햇빛향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냄새가 난다. 과학적으로는 자외선에 의해 살균된 냄새지만, 감성적으로는 햇빛이 준 선물 같다. 햇빛에 말린 이불에서 자는 밤은 더 포근하다.


나이가 들면서 햇빛에 대한 선호도 변한다. 젊었을 때는 밝고 강한 햇빛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부드럽고 따뜻한 햇빛을 선호한다. 직사광선보다는 커튼을 통과한 은은한 빛이 편안하다. 그래서, 최근에는 넓은 창으로 되어있고 조도가 일정한 북향의 공간이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나에게는 사방의 빛을 담을 수 있는 집이 좋은 집이다. 네 개의 방향을 모두 가지고, 시야를 가린 곳이 없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 오후에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따뜻한 빛, 저녁에 노을빛으로 물드는 집. 그런 집이라면 누구에게나 좋은 집이 될 수 있다. 다만, 서울에선 흔치 않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뿐이다.


tempImagemfYaqP.heic 은은한 서향빛은 여유로운 나른함을 주는 선물같은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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