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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Mar 21. 2016

건축가의 역사 읽기 IV 근현대사

네번째. 한국전쟁 1/7 그 전쟁의 발발

통일독립국가 건설좌절과 모순의 폭발


우리는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 전면전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의 

첫번째 국면(해방 직후부터 시작하여 해방된 민족 통일 국가를 수립하려던 민족의 열망이 좌절된 시기)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한 연구자의 추정대로 특히 1948년 제주도 4.3 사건 이후 전쟁 발발 때까지 

게릴라전을 포함한 정치적 투쟁으로 10만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할 때 

우리는 이미 그것을 평시의 상태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 최장집 교수 

최장집 교수

1949년 8월 소련은 핵무기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그동안 미국만이 보유하고 있던 가공할 대량살상무기인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과 대등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1947년이후 시행되어왔던 미국의 적대적인 대소봉쇄정책을 포기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 대륙에서도 같은 해 10월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축출되고 중국 공산당이 지도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을 지배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시되던 1949년 상반기부터 미국은 동북아에서의 지배권을 회복하고 중국본토의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였다. 

즉 패전국인 일본을 아시아의 후방 병참기지로 전환시키고 한반도, 대만, 베트남을 각각 군사적 진공을 위한 교두보로 삼으며 최종적으로 중국 대륙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전략방침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하였던 모든 분쟁이 바로 미국의 이러한 군사전략과 결정적으로 연관되었다. 


일본의 재무장을 포함하여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미군의 군사기지 설치를 둘러싼 미국과 아시아 민족과의 끊임없는 충돌...등등 시간과 공간의 차이로 인해 전혀 무관해 보이는 개개의 사건들은 실은 미국이 주도하고 계획한 하나의 의도와 논리에 의해 서로 밀접히 얽혀 있는 셈이다. 


미국은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자 1949년과 1950년 상반기 사이에 한국을 우선적 목표로하고, 아시아 전역에서 반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일본에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대비체제를 강화시켜 나갔다. 

우선 점령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제8군의 전투태세를 강화시키기 위한 제반 조치들이 취해졌다. 

전투사단의 본격적인 전쟁을 대비한 훈련돌입과 동시에 미국의 군사기지에 대한 대폭적인 시설확장과 대대적인 보수사업이 추진되었다. 

1949년 10월에는 5,800만 달러를 투입하여 오키나와 미 공군기지 설비를 확장시켰으며, 

1950년 2월에는 약 600만 달러를 투입하여 요코스카 미 해군기지의 시설확장 공사를 실시하였다. 

이런 군사시설의 확장이나 보수공사들과 함께 미 극동사령부는 '롤 업 Roll up' 계획이라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때 태평양 각지에 흩어진 비축 무기를 재생하여 미 제8군 보병사단을 무장시키려는 계획을 비공식적으로 비밀리에 실행하고 있었다. 

이 계획에 의하여 1949년 한 해만 해도 20만톤 가량의 군수품이 오키나와에서 일본으로 조달되었다. 

오키나와 미 공군기지
요코스카 미 해군기지

1949년 4월 「대충자금 특별회계법」이 일본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미국은 일본의 군수산업을 재생시키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의 군수산업은 전쟁도발의 근원을 없애기 위하여 그 전부가 미국에의해 몰수 되도록 되어 있었으나 예정된 군수산업의 30 %도 몰수되기 전에 배상 몰수조치가 중단되고 이들 군수산업 공장들은 미국의 지휘하에 다시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확고한 미국의 병참기지이자, 아시아에서의 반공을 위한 무기고로 자리잡게 되었다. 

1949년 이후 벌어진 일본의 병참기지화 과정이 한반도와 어떤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점은 한국전쟁 중에 일본이 수행한 역활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1950년 6월 이전에 일본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야말로 한국전쟁의 기원을 설명해 주는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다.

미국비행기는 일본비행장을 이륙하여, 

닛산모터와 라이센스하에 제조된 이시데키회사의 네이팜탄을 한국에 떨어뜨렸다. 

미국대포는 방대한양의 일제포탄을 쏘아대고, 

미국의 제7함대는 일본항을 출발하여 한국해안선에 근3년간 포격을 퍼부어 댔다

한국전쟁에 대한 군수품 조달활동을 지원하기위한 저장소와 여타 설비들은 일본에 소재하였다. 

중요한 재건 계획은 일본의 산업설비와 노동력에 의존하였다. 

그들은 군수품의 운송과 취급, 군대의 이동과 

주거공급및 병원 수용에도 실제적인 용역을 제공하였다. 

……전쟁의 대부분 기간동안, 한국의 모든군대는 

주로 2차 대전 당시의 트럭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거의가 일본에서 개조, 수리된 것이었다

- Herbert P. Bix 허버트 빅스, 지역 통합 전략 중

Herbert P. Bix


미국은 모종의 대규모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일본인들의 효과적인 협조가 필요하였고, 이를 보장받기 위하여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을 부활시키고자 기도하였다. 

이런 미국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불행한 제물로 활용되어졌다. 

재일 한국인에 대한 박해는 장차 있을 한반도에서의 군사작전 중에 야기될지도 모를 배후 위협을 사전에 제거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1949년 9월 8일 일본정부는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의 명령으로 일본에 있는 주요 한국인 조직들(한국민주청년동맹, 한국인거주자 연맹 등)을 해체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간부들을 추방시켰다. 

맥아더는 또 일본의 병참기지화에 완강하게 반대하고있는 일본공산당을 1950년 3월 3일 불법화시키고, 이어 6월 1일에는 동경시내에서의 모든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비상계엄을 발동하였다. 

1950년 6월 16일에는 집회와 시위를 금지시키는 비상계엄 조치를 일본전역으로 확대시키어 일본은 사실상의 전시동원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확히 9일후인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특히 이 무렵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보다 공격적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훗날 베트남전쟁의 확전에 크게 기여하게 될 대중국 정책에 있어서 초강경파인 John Foster Dulles 델레스가 1950년 4월 국무장관 고문으로 취임하면서 한반도 주변의 전쟁 위험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4월 8일 미국 정부는 국가안전회의 각서 68(NSC-68)를 통해 국방비를 종래의 135억 달러에서 500억 달러로 대폭 증액시키는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이 계획은 한국전쟁의 발발을 배경으로 전격 시행되게 된다. 

John Foster Dulles

1950년 1월 26일에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되었고, 2월 16일에는 맥아더와 이승만의 비밀회동이 있었으며 미 합참의장인 브래들리, 해군참모총장 셔먼,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공군 사령관 반덴버그 등이 한국과 일본을 자주 왕래하면서 군사시설 등을 확인하였다. 

6월 18일에는 델레스가 38선을 시찰하였고, 21일에는 동경에서 델레스와 맥아더의 비밀회담이 있었다. 

그리고 미 국방장관 루이스 존슨과 통합참모본부 의장 오민 브레들리가 일본과 한국 등 극동지역의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6월 25일 한국전쟁은 발발하였다. 

일본의 재무장과 미국의 적극적인 극동정책에 고무된 이승만 정권은 연일 소리 높여 북진통일을 주장하였다. 

국가안전회의 각서 68(NSC-68)


1950년 6월 14일 이승만은 그의 정치고문인 올리 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한국의 상황에 관해 적고자 합니다. 

본인은 지금이 평양의 도당들을 소탕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하는 데 최적의 시기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우리의 국경선으로 삼기 위해서 

김일성과 그 일당들을 먼 산맥으로 쫒아내어 거기서 굶어 죽게 할 것입니다. 

.... 우리 국민은 북진통일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녁 동포들 또한 열렬히 우리의 진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런 호전전인 이승만의 성급한 전쟁개시를 염려하여 남한 정부에 대한 무기공여에 시종일관 조심성을 보였다. 


1949년경 미 국무성 대표로 일본에 와 있던 '윌리엄 세발트'는 "공격을 위한 적절한 무장이 갖추어지면 이승만이 38선을 넘어 곧바로 진격할까 염려된다"라고 그의 저서에서 언급하였다. 

이런 요인으로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남한의 군대는 몇가지 분야에 있어서 북한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지게 되었다. 

한편 북한과 소련 및 중국은 미국에 의한 일본의 재무장에 대하여 극도의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소련은 1950년 1월 6일 자 Cominform Journal 코민포름 저널을 통해 미국의 대일 정책을 강도 높게 비난하였다.


중국과 한국에 있어서 미 제국주의자들의 약탈계획이 실패로 끝난뒤에 

국무성과 미 군국주의자들은 그들의 주관심을 

소련과 아시아의 제 국가에 있어서의 민주적 운동에 대한 군사적 모험의 중요기지인 일본에 쏟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근거없는 여러가지 구실을 붙여 

일본과의 평화조약 조인을 지연시키도록 획책하고 있으며, 

또 이런식으로 미군의 일본장기주둔을 합법화하려 들고 있다


2월 14일에는 중.소 우호동맹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였다. 

북한은 1949년 7월 15일에 창설된 조국 보호와 방위를 위한 지지자 협회를 중심으로 기부금 형식의 기금을 마련하여 소련으로 부터의 무기 구입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구입된 장비는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에도 대부분 소련으로부터 수송 도중에 있었으며 북한이 공격에 필요한 장비를 완벽하게 갖추게 된 것은 1950년 7월 말 경에 이르러서였다. 

대규모 전면전에 대한 북한의 준비상태는 미군 정보팀의 북한정부문서 분석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1950년 1월 ~ 6월의 날짜가 붙은 북한 노동당 상임위원회의 일급 비밀 작업 계획은 북한 정부 정책의 모든 것을 상세히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또한 2개 사단의 참모장을 포함하여 수많은 북한의 고위 장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들은 다가 올 전쟁을 거의 육감으로 느꼈을 뿐이고 전쟁개시 1주일 전까지도 공격에 대한 아무런 구체적인 지시를 받지 못했다.

 

6월 25일 당일의 북한군의 동원태세는 1950년 7월 30일 맥아더사령부에 보고한 한 장교의 6월 25일 북한군의 동원태세에 관한 보고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전쟁이 시작된 6월 25일 당시, 북한은 동원계획을 수행하지 않았다

……오직 6개 부대가 침략이 시작되었을 때 전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북한의 전쟁계획이 13개에서 15개 부대를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건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전쟁은 개시되었다. 


그러나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 치듯이 갑작스레 전쟁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전쟁은 이미 4.3 제주항쟁에서 시작되었고, 여순봉기와 전면적인 유격전을 거치면서 최소한 10만 이상의 희생자를 양산하면서 치루어진 적대적인 두 세력간의 대규모 무력 충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쟁이었다. 

또한 1950년 6월 25일 훨씬 이전부터 38선에서는 남북한 군대간의 대소규모 충돌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1950년 4월 미 국무성의 한 관리도 말했다. 


38도선은 실질적인 전선이다.

……전투가 매일 계속되고 있고 아마 1,2000명의 전투원이 실제 교전하고 있다


빈번한 38선 주변에서의 무력 충돌은 남북 모두에게 상당한 희생을 안겨 주었다. 

이러한 무력 충돌은 대부분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주로 남한군 지휘관이 주도한 군작전의 일환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거의 통제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그 지휘관들이 정치지도자의 직접 명령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남북한 어느쪽도 38선을 일반적인 국경선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은 38선 근처의 무력충돌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으며 실제 전투에서도 대부분 북한군이 패배하였다. 

한국전쟁 발발전까지 38선 지역에 배치된 북한의 병력은 정규군이 아니라 다른 공산국가와 마찬가지로 내무성 휘하의 경무장된 경찰병력인 경비대들이 38선을 수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갑자기'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완전히' 끝난 역사의 한 토막이 아니다. 

한국전쟁은 해방 이후 우리민족이 기울여 온 통일 독립국가 건설의 노력이 좌절되면서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된 것이며, 

또한 오늘날의 이 순간까지도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살아있는 현재의 일부'인 것이다.

- 박세길의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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