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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shlee Apr 04. 2016

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III 제주의 비경 구엄리

마흔여덟. 스치듯 지나는 풍광과 이야기를 품은 구엄리 바다

아름다운 어촌 하면 항상 빠짐없이 언급되는 어촌마을, 구엄리...

서부해안도로(애월해안도로)를 타다보면 맨발로 걸을수 있는 길다란 색돌길과 연자방아를 세운 포구를 보적 있을것이다.

그곳이 구엄리인지 지명은 알지 못해도 해안도로 드라이브를 하다보면 내려서 사진 한장 정도는 찍고 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구엄에서 시작하여 중엄~신엄~고내포구에 이르는 해안도로길은 제주의 해안도로에서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게 소문난 곳이기도 하다.

사진을 찍고 주변을 찬찬히 둘러 보자면 특별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해안이다.

구엄리…바다.

처음 눈에 들어 오는건 아무래도 셀카의 배경이 되는 물고기 조형물.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 모양인 벤취에 앉아, 혹은 반은 땅속에 묻힌 물고기의 입속에 들어가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긴 사람들도 많을듯 하다.

배가 늘어선 선착장을 이어 걸어가면 파식대가 장관을 이룬다.

주상절리 라고 하기에는 조금 낮아 보이는 비주얼과 외돌개근처의 모습을 연상케하는 해안선들…

여기에 도대불이 자리하고 있다.

방사탑 같은 느낌으로 언듯 스치고 지나가기 쉬운 모습의 등대원형이다.


자연 암반위에 현대식 등대의 형식을 갖춘 도대불.

방사탑과는 형태가 사각 뿔 모양으로 쌓아 올려져 있는 모습이 특이 하다.

도대불은 전기가 들어오기 전의 등대로 현대 등대들의 원형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옛날 이 구엄 포구를 밝히던 도대불도 멋진 구엄리 바다의 장관에 일조를 한다.

도대불

구엄리에서는 처음에 나무(구상나무)를 세워 그 위에 장명등(잠망등이라고 발음하기도 했음)을 달아 불을 켰었다.

그러나 나무가 삭아서 오래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돌로 쌓은 원뿔형의 도대를 만들었다.

구엄 마을 사람들이 구엄 바닷가의 돌을 등짐으로 지어 날라다 만든 것이며, 이 돌들 중 일부는 용암석이었다.

이 도대불은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았고, 상부에는 불을 밝히기 위한 30~40cm 정도의 나무 기둥이 있었다.

나무기둥 위에는 판자를 설치해 못으로 고정시켰다. 불은 솔칵이나 생선기름을 이용했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직육면체 모양의 도대를 만들었다.

도대는 다듬은 돌로 대를 쌓아올리고 그 위에 작은 지붕을 두고 불을 켤 수 있도록 했다.

상자형 2층의 형태로 현무암으로 거친 다듬을 하였고, 높이 165㎝에 철탑은 185㎝였으며, 하단은 310㎝, 상단은 197㎝였다. 철탑에는 호롱불을 보호하기 위한 갓이 설치되어 있었다.

1970년대까지도 사용되었는데 1974년 가까운 곳에 아세아 방송국이 개국되면서 높게 설치된 안테나의 불빛이 멀리까지 보이게 되자 이 도대불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철탑은 1997년 녹슬어 없어져 버렸고, 시멘트로 마감한 맨 윗면에는 '1968. 8. 5.'이라는 보수년대 표시가 있다.

도대불의 관리는 보재기(鮑作人, 어부)들이 바다로 나가면서 켜 두고 새벽에 어로작업을 마치고 들어오면 껐다고 한다.

연료로는 동식물의 기름이나 솔칵 또는 석유를 썼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에는 포구도 많았고, 그 포구마다엔 도대불들이 밝혀졌었다.

그러나 전기가 일상화되면서 원형의 도대불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형편인데 이곳 구엄리 도대불은 그 원형을 잘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런 도대불 앞에 도대불보다 훨씬 크게 축조된 군사시설에 바다쪽으로의 시야를 빼앗긴, 더이상 불을 밝힐수 없는 등대...

또 한가지 주목 해야 할것은 구엄리 넓은 파식대가 염전이었다는 사실이다.

제주말로 땅에 묻힌 넓적한 바위를 '돌빌레'라 한다


구엄리 돌빌레가 염전.


둑도 없는 이곳에다 바닷물을 담아 소금을 생산했던 것일까.

제주는 물이 땅에 고이지 않는 지형에  서해안처럼 넓은 갯벌도 없어 소금생산에 전혀 적합한 환경이 아니다.


구엄리에서는 갯벌을 염전으로 사용하는 대신 이 돌빌레를 염전으로 사용했다.

너른 돌빌레는 마치 거북등처럼 금이 나 있다.

그 금이 난 부분에 흙담을 쌓아 물허벅 등으로 바닷물을 퍼담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었던 것이다.


구엄 돌빌레에서 생산된 소금은 넓적하고 질이 좋아 다른 소금에 비하여 비싼 가격에 팔렸고, 나라에 진상까지 되었다한다.

돌염전은 마을 공동 소유가 아니라 개개인의 소유였고, 소유권이 땅처럼 대대손손 자손에게 내려져왔다.

그럼 이 돌빌레의 소유경계는 자연적으로 난 금으로 소유경계를 정하였다 한다.

대락 한 가구당 20~30평 정도씩.

이 돌빌레는 1950년대 서해안 갯벌의 천일염 대량생산과 값싼 외국의 암염 수입에 의하여 수익성이 없어지자 그 명맥이 끊겼다.

이재수의 난(1901) 때 천주교 신도들이 이곳 염전의 간수통에 숨어서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내려오니 참으로 사연많은 염전이다.

돌빌레에서 생산된 소금의 맛은 천일염보다 더 나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 돌빌레 자체의 현무암과 둑으로 쌓은 진흙때문에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은 미네랄이 함량이 더욱 많았기 때문에 맛이 더 좋지않았을까…

이 너른 돌빌레 한 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니 바위결의 모양새가 한결같지 않고 여러모양인게 참 재미있다.

돌빌레 칸칸엔 마치 내땅이라는 표식의 지문처럼 각각의 독특한 무늬도 세겨져 있다.

시간을 보낼수록 더많은 볼거리와 더 많은 이야기를 주는 구엄리 바다.

아름다운 풍광에 많은 이야기까지 품어안은 구엄리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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