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chitect shlee Feb 01. 2017

건축가의 역사 읽기 IV 근현대사

다섯번째. 한국전쟁 그 후(전쟁 후~516쿠테타) 2/5

부패한 권력은 권력을 손에 넣게 되면 결코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권력 자체가 민중의 이익이나 국가와 민족에 대한 봉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은 온갖 특권을 독점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의미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권력의 달콤한 맛을 보게되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집단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만을 위해서 미국에 추종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미국 자신이다. 

미국은 전세계 후진국에서 그랬던것처럼 이들을 계속 자신의 주위에 거느린 채 하수인으로 사용하기위해 욕심을 채워주는 방법을 택한다. 

적당한 권력과 부를 통해 이들을 지속적으로 주종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끈으로 이용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부정부패는 이들의 본질적 속성으로 자리잡고 권력이 있는 자리는 미국으로부터 나오는 온갖 특권을 가장 손쉽게 거머쥘 수 있기 때문에 부정부패는 권력과 결부되어 더욱 극심할 수 밖에 없으며 민중들의 삶은 그만큼 더 피폐해 질 수 밖에 없다. 

휴전후 이승만정권은 억압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안정을 이룩한 듯 보였으나 그 안정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이승만정권을 함께 만들고 유지하던 반동적 친미세력들이 분열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하게 됨에 따라 그 권력에서 소외된 일부 인사들이 야당세력을 형성하여 정권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을 가한다. 

야당 세력들은 과거 친일파들의 한민당을 기반으로 과거 이승만 정권에서 국무총리, 장관 등 요직에 있었으나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신익희, 조병옥, 장면, 정일형, 현석호, 이태용에 의해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민주당 신익희
장 면, 조 병옥
한민당

민주당 또한 미국의 지지하에 이승만이 누리고 있던 특권적 지위를 그대로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점에서 이승만정권과 본질적 차이는 없었지만 일정 부분 민중과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민주당이나 다른 야당의 입장에서 볼 때 집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선거에서의 승리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들 야당은 자금과 조직 면에서 집권세력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표를 모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절대적 민중의 지지말고는 없다. 

그렇기때문에 야당, 특히 민주당은 비록 기만적이기는 하지만 민중의 요구를 어느 정도 대변하고자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 

민중 역시도 투쟁의 무기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억압 정치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야당에 표를 던지게 된다. 

이런 결과로 인하여 선거 과정에서는 민중과 야당 간에 독재 권력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이 형성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민중의 참된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는 이승만 정권이 공정한 선거를 통해 야당과의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 사실이다. 

그래, 이승만 도당이 장기집권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은 당연히 온갖 불법과 사기로 점철될 수 밖에 없었다.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 불법적인 집권연장에 성공한 이승만은 2년 뒤인 1954년 또다시 추악한 집권연장을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부산정치파동으로 국회광장에 모인 각도 자결단

당시 이승만의 재집권에 가장 큰 장애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대통령의 중임 제한에 관한 규정이었다. 

이 조항대로라면 이승만은 다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 

이승만은 문제의 이 조항을 삭제하고 종신집권의 길을 열기 위해서 헌법개정을 획책하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1954년 5월 20일의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의 자유당은 개헌 가능선인 의석수의 3분의 2를 확보하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 

개헌 가능 의석을 확보하기 위한 이승만정권은 불법적인 대규모 선거자금을 긁어 모아 이를 바탕으로 폭력깡패들을 고용하여 상대 후보를 협박하고 위협하였으며 유권자들을 매수하는등 대규모 부정선거를 감행하였다. 

야당 후보의 유세장이 폭력깡패들의 기습으로 난장판이 되기 일수였고 야당의 선거운동원들은 아무런 이유없이 경찰의 손에 체포되었다. 

야당후보들은 깡패들의 거듭된 폭력과 테러위협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후보를 사퇴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군과 경찰은 물론 정부의 모든 부처를 장악하고 있었던 미국인 고문들은 이승만정권의 불법행위를 방관함으로써 부정선거의 공범자가 되었다. 

이렇게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 부정선거의 결과 자유당 114석, 민국당 15석, 대한국민당 3석, 국민회 3석, 제헌동지회 1석, 무수속 67석이 당선되었다. 

3대 민의원 선거 포스터

함태영 부통령 제3대 민의원선거와 포스터


당초 목표한 개헌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자유당은 무소속과 야당의원들을 공갈과 협박으로 또는 금전으로 매수하여 개헌정족수 136석을 넘는 137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에 이승만정권은 1954년 9월 9일 이기붕외 135명의 서명으로 대통령 중임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개헌의 내용은 한마디로 이승만이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하는것이고 당시 79세의 고령이었던 이승만이 죽으면 자유당 부통령이 이어 본인들만 잘 살겠다는 것이었다. 


개헌안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민투표제 가미 

2. 순수한 대통령제로의 환원 

3. 경제제도의 자유경제체제로의 수정 

4. 대통령 궐위시 부통령의 승계 제도 

5. 초대 대총령에 대한 중임 제한규정 철폐 


국회 내에서의 개헌은 이승만 반대 세력에 대한 온갖 협박과 회유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깡패들을 앞세운 관제데모, 야당의원들을 상대로한 공작정치, 개헌에 반대하는 신문과 잡지의 폐간, 의원들을 상대로한 금품살포 등등 이승만 도당은 할 수 있는 모든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다 동원되었다. 

그러나 11월 27일 국회에 상정된 개헌안의 표결 결과 헌법개정에 필요한 3분의 2인, 136표에서 1표가 부족한 135표의 찬성에 그치고 말았다.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개헌안의 부결을 선포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28일 세계 의회사에 길이 남을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자유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열어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작일의 부결 선포는 의사과정의 잘못된 산출방법에 의하여 착오로 선포된 것이고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의 정확한 수치는 135.333..... 인데 자연인을 정수 아닌 소숫점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다.」


정부에서도 긴급 국무회의를 열고 공보처장의 담화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60 표의 반대표는 총 수의 3분의 1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한국은 표결에 있어서 단수(소숫점 이하의 숫자)를 계산하는 데 전례가 없었으니 단수는 계산에 넣지 말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개헌안은 통과되었다」 


이어서 29일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전번 회의에서 부결이라고 선포한 것은 계산 착오이므로 취소하고, 가결되었다고 번복 선포하였다. 

이승만은 이날 오후 3시 경무대에서 임시국무회의를 열고 개정헌법을 공포하였다. 

결국 꽁수에서 나온 「四捨五入改憲 사사오입 개헌(요즘은 많이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지만 1950년대만 해도 일본식 표현이 익숙한 시절이기 때문에 반올림개헌사건이 아닌 사사오입개헌사건으로 명칭이 굳어져 그대로 사용한다)」 의 통과로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한 대통령 출마의 길이 열렸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대통령 출마를 고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거듭하며 정치깡패들을 앞세운 관제 데모를 연일 계속하며 민중의 정치비판에 마차, 우차의 행렬까지 보여주는 馬意,牛意를 동원하여 본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의사에 굴복하여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겠다라는 얼토당토 않은 발표를 하였다. 

사사오입개헌 기사
사사오입 - 단상으로 올라간 고 이철승  국회의원과  번복하는 국회부의장 최순주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에 국민의 의사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출마하신다는 이승만을,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였고, 민주당은 대통령에 신익희, 부통령에 장면을 진보당은 조봉암을 대통령에 박기출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선거전이 시작되자 이승만은 야당 후보와 그 선거운동원들에게 테러, 협박, 공갈, 매수, 선거 운동 방해 등 온갖 부정행위를 자행하였다. 

선거 10일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갑자기 서거하였다. 

이승만의 사주에 의한 독살이라는 일부 주장도 있었으나 확인되지 못하였고 신익희의 유해를 운구하던 수천 명의 군중들이 시위대로 돌변하여 이승만의 부정부패와 독재에 대하여 항의하였으나 중무장한 특별경찰대의 강력한 진압작전으로 시위대는 곧바로 진압되었다. 

제3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이런 공포스런 분위기 속에서 치루어진 제3대 대통령 선거 결과 이승만 504만 6,437표, 조봉암 216만 3,808표, 고 신익희 185만 표를 획득하여 엄청난 부정선거를 자행한 이승만이 52%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이 401만 2,654표를 얻어 380만 5,502표를 얻은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제3대 대통령 개표
3대 대통령 취임사

제3대 대통령 선거 유세과정에서 민주당의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와 진보당 조봉암 후보의 평화통일 주장이 모든 민중들 부터 폭풍적인 호응을 이끌어 냈으며, 당시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라는 옹색한 구호로 민주당과 진보당의 주장에 대응하였었다.

작가의 이전글 coffee break...志於絶頂極泉 지어절정극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