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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Jun 13. 2023

건축 이야기 XXVII 청와대

; 보존과 역사회복 사이

현 상춘재와 녹지원 인근-융문당, 융무당, 춘안당

현 영빈관 인근-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논밭인 팔도배미와 재당인 경농재.

고종 5~30년 무렵으로, 경무대를 조성하며 궁성을 둘러 경계

망국과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 및 관사 단지 개발에 따라 경무대에 있던 융무당, 융문당 등 많은 건물이 매각되고 이건 되며 헐렸죠. 


개장 직후인 5월과 6월 50만 명을 훌쩍 넘었던 관람객 수는 꾸준히 줄더니 지난해 12월엔 11만 명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대통령실 산하에 자문단이 있고 거기서 관련 논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원래 지난해가 끝나기 전까지는 자문 결과를 발표하겠다, 이렇게 말을 했었는데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현재는 기약이 없는 상태입니다.

- YTN, 2023.02.01

청와대 본관과 대정원

청와대 개방이라는 말에 대해 처음부터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으로 이런 기사는 어처구니가 없게 느껴집니다.

우선 외빈 접견이나 비공식회의 장소로 이용되는 상춘재와 영빈관은 작년(2022년) 12월 5일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국빈 만찬을 시작으로 해외 순방 직전까지 영빈관을 15번, 상춘재를 2번 사용해 이틀에 한 번꼴로 청와대를 찾은 셈인데, 보안상의 이유로 사전예고 없이 행사 전후 해당 구역의 일반인 관람은 제한됐습니다.

최소한 신축이라면 계획에서 완공까지, 보안 점검까지 생각한다면 현 정부 임기내에는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질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겨우 이런것이 아니죠.

지난해 7월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하 박장관)은 본관과 관저, 영빈관은 프리미엄 근현대 미술품 전시장으로 활용해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처럼 건축의 원형을 보존하면서 전시하는 개념이라고 미디어 브리핑이 있었습니다.

청와대가 언제부터 청와대일까요.

사실 지난 여름, 문체부와 문화재청 이 부분에서 충돌이 있었습니다.

청와대 뿌리에 대한 인식이 문화재청은 남경으로 지정된 약 1000년 전, 문체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을 보고 있습니다.

역시나 박장관은 ‘부 수립은 물론 6·25 전쟁, 산업화, 민주화의 고뇌를 함께한 대통령의 문화 흔적’이라고 강조하며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철거된 구 본관 터(조선 총독 관저)의 모형 복원을 포함해 진통을 겪었기에 본관 터 등을 대통령의 리더십, 삶 등 상징적 공간으로 꾸미겠다는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장관은 2014년 한림대학교에서 열린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 세미나에서 ‘우리는 틈만 나면 예외를 자꾸만 두려고 그러는데 법이 정해지면 지키는 게 세계를 경영했던 나라들의 차이죠.(중략) 일본도 아시아를 지배해봤고 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도 보면 준법 정신이 좋은데‥ 민족적인 교육도 있지만 세계를 경영해본 습관입니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광개토대왕비'를 발견한 건 일본이고 우리는 발굴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의 칼럼에는 동일본대지진 직후 일본인들의 침착한 대응에 대해 칭찬하며, 한국을 향해서는 "호들갑에 익숙하다, 남 탓하기와 떼 법의 싸구려 사회 풍토가 득세했다"고 썼습니다.

이런 인물이 이야기하는 청와대 뿌리를 1948년으로 밀어붙이는 모양새는 우습기 그지 없습니다.

청와대는 고려시대 남경터이자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에 해당되는 지역에 조성되었습니다.

고려 남경 궁궐, 출처 경향신문

판문하부사 권중화, 판삼사사 정도전, 청성백 심덕부 등을 한양에 보내서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했다. 권중화 등은 전조 숙왕 시대에 경영했던 궁궐 옛터가 너무 좁다하고, 다시 그 남쪽에 해방(亥方; 정북에서 서로 30도 각도를 중심으로 한 15도 각도 안의 방향)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壬座丙向; 북북서쪽을 뒤로하고 남남동을 앞으로 향한 방향)이 평탄하며,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으므로 여기를 궁궐터로 정하고, 또 그 동편 2리쯤 되는 곳에 감방(坎方; 정북을 중심으로 한 45도 각도 안의 방향으로 북쪽)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에 종묘의 터를 정하고서 도면을 그려서 바쳤다. 

- 태조실록 3(1394)년 9월 9일


전조 숙왕이란 고려의 숙종(고려 15대왕)을 의미하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숙종 때의 남경 왕궁은 지금의 경복궁보다 더 북쪽, 즉 지금의 청와대 자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는 개국 초기부터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에 크게 의존했는데, 국가와 왕실의 운명을 융성·영속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수도 이외의 땅에 삼경과 삼소를 설치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문종(고려11대왕)은 1067(문종 21)년에 지금의 서울인 양주를 남경으로 고치고, 다음 해에는 남경에 신궁을 건설했지만 몇 년 후 남경은 폐지됐는데 1104(숙종 9)년에 이르러 다시 설치합니다.

당시 숙종은 아예 남경으로 천도하고자 직접 남경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1101(숙종 6)년 이후 남경 왕궁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계속 남아서 예종, 인종이 행차해 신하들로부터 조하(朝賀; 동짓날, 설날, 즉위, 탄일 따위의 경축일에 신하들이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던 일)를 받고 연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1231(23대왕, 고종 18)년부터 시작된 세계 대제국 몽골(원나라)과 약 40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국토는 황폐해지고 많은 건물과 문화재가 소실됩니다.

충렬왕(25대왕) 당시에도 왕이 남경으로 행차했거나 그곳에서 사냥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왕궁과 관련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데, 아마 몽골과의 전쟁 때 남경 왕궁이 피해를 봤고, 왕이 거처할 정도의 집조차도 없어서 임시 행궁에서 머물렀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남경은 1308년 충선왕(26대왕)이 즉위하자마자 한양부로 강등된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 원의 간섭을 배격하고 자주적인 고려 재건을 위한 개혁 정책을 편 공민왕(31대왕)대에 이르러 남경을 복원하고 나아가 한양 천도를 계획해 왕궁을 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남경 왕궁 건설과 천도 계획은 중단되었고 공민왕의 아들 우왕과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34대왕) 때도 남경으로 천도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국력이 기울어가던 상황에서 천도는 결국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청와대 구 본관 터에는 역사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는 주목이 한 그루 자라고 있습니다. 

‘청와대가 고려의 옛 왕궁터였다는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수령 약 749년(2019년 기준)으로 추정되는 이 주목은 나이 기준으로만 한다면 고려 원종(24대왕) 때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흔적입니다.

고려사-남경 건설을 처음 계획한 문종, 출처 경향일보

그렇게 몽골과의 전쟁 후 160여년간 재건을 하지 못한 남경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고려 15대왕인 숙종(재위1095~1105)부터 이어온 한양 천도가 현실로 이루어지게 되고 청와대는 조선 제1궁의 일부가 됩니다.

조선시대(대한제국시대 포함)의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의 북쪽, 즉 북문인 신무문을 포함한 궁장(궁궐을 둘러 싼 성벽) 뒤쪽에 위치했습니다.

경복궁은 조선이 건국 3년 뒤, 1394년에 착공돼 이듬해 1395년 9월 말에 1차 완공되었지만, 2년 뒤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이듬해, 정종이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4년 만에 경복궁은 빈 궁전으로 전락합니다. 

태종 5(1405)년 한양 재천도를 단행했지만 이때 태종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새로 건설한 창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태종 이후, 조선 전기 대부분의 왕은 경복궁에 거처했으며, 청와대는 그 북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서는 회맹(會盟; 왕이 공신과 역대 공신의 자손들과 함께 회맹단에서 하늘아래 맹서하고 논공 행상을 행하는 의식)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회맹단은 1. 겸제 정선의 ‘취미대’ ‘북단송음’ 등의 그림과 기록을 통해 지금의 신무문 밖 북동쪽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2. 태종실록에 경복궁의 북동에서 회맹이 있었다는 것으로 미뤄 북동 또는 대은암동이 회맹단을 포함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청와대 춘추문과 춘추관

임진왜란(1592년)으로 소실된 경복궁이 고종대에 복원되기까지의 약 270년간 지금의 청와대 지역은 전 시기와 비슷하지만 정선의 ‘은암동록’과 김상헌의 시 ‘회맹단’, 그리고 회맹단 부근에서 활쏘기할 수 있었다는 기록 등을 통해 폐허 상태인 경복궁으로 인해 이전보다 더욱 인적이 드물고 황량한 상태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경복궁의 신무문 밖에서 회맹할 때 전하께서 앉으셨던 단이 있는데, 그전부터 무사가 모여 활쏘는 것을 금했습니다. 한 재신(宰臣)이 어제 떼지어 모여서 마구 쏘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금지하니 그중 두 무사가 팔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돌진해 거의 구타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숙종실록 28(1702)년 10월 27일


고종이 즉위하면서 경복궁이 복원돼 다시 왕궁으로서 기능한 이후부터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1910년까지 약 50년간의 시기 지금의 청와대 자리, 즉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에 대한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경복궁에서 청와대 지역으로 출입하는 정문은 신무문이고 신무문을 거치지 않고 후원으로 들어가는 문으로는 동쪽의 춘생문과 춘화문, 서쪽의 추성문과 금화문, 경농재 인접 담장의 용강문 그리고 ‘천하제일복지’라는 글자를 새긴곳에서 서쪽으로 연결되는 서북쪽 담장의 현무문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춘생문의 담장은 태화궁(太和宮-현재 국무총리 공관)과 연결됐고, 춘화문에서 시작한 담장은 북으로 북악산 중턱을 지나 서쪽 추성문으로 이어지는데 그 길이는 698간(약 1675m)에 이르렀습니다. 

후원의 중앙과 동쪽 춘화문 안에는 후원을 지키는 금위군의 수직소(守直所; 건물을 맡아서 지키는 곳)인 수궁이 있었습니다.

이 후원은 융문당과 융무당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 열병, 교련을 위한 권역, 오운각을 중심으로 하는 휴식을 취하는 권역, 경농재를 중심으로 하는 친경(親耕; 왕이 농사를 직접 체험하는 일 또는 그를 실행하는 전답)과 관련된 권역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경농재 지역 현 영빈관 주변

고종대 복원된 경복궁의 신무문의 북쪽지역(현재 청와대와 그 주변)에는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春塘臺; 과거를 실시하던 곳)와 같은 기능으로 사용하기 위한 488칸의 경무대 景武臺가 조성되었는데 중심 건물로 과거시험을 보는 융문당과 군사를 조련하는 융무당, 행각인 춘안당과 벽화실, 임금 휴식처로 사모정 오운각과 옥련정, 성균관의 별당 비천당등이 1868년에 세워진 건물들이고, 1893년에는 현재 영빈관 주변에 각 도의 풍년과 흉년 여부를 알아보던 경농재, 부속 동쪽 대유헌과 서쪽 지희실, 경농재의 반루(半樓)형식의 관풍루, 일종의 안채역할의 양정재등이 들어섰다가 총독관저 신축때 헐려 나갔습니다.

1920년대 융문당과 융무당
융무당 권역 현재 녹지원과 상춘재

대한제국 말기 후원의 건물 배치는 ‘북궐도형’(北闕圖形; 1901년과 1907년 사이에 만든 경복궁 도면, 북궐은 경복궁의 별명)을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확인됩니다. 

이 ‘북궐도형’과 1907년쯤 만든 ‘궁궐지(宮闕志)’에는 후원 건물이 모두 256칸 반(半)으로 기록돼 있는것으로 미루어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러 후원 건물의 상당 부분이 훼손되거나 철거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일항쟁기(2007년 공식 채택된 일제강점기) 아관파천 후 경운궁(덕수궁)으로 경복궁은 위상이 다시 급속히 추락하다 결국 1912년 경복궁은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됩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의 권위와 향수를 지우려는 목적으로 조선물산공진회를 추진하면서 경복궁 부속건물을 이용하거나, 많은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다수의 가건물을 지었습니다.

이 공진회 때 후원의 왕궁 건물들도 훼손이 추정되는데 1921년에는 경농재, 융문당, 융무당, 침류각, 오운각 등의 일부 전각만 남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929년에는 조선박람회가 경복궁과 옛 후원 자리에서 열리면서 몇 동의 건물만을 제외하고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1937년부터 1939년에 걸쳐 조선박람회 이후 한동안 공원으로 남아 있던 옛 후원 자리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습니다.

침류각; 1989년 청와대 대통령 관저 신축 시 이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우리나라도 종전과 함께 광복을 맞았고 미 군정 아래에서 국가 건설을 준비하며 미 군정의 최고 책임관인 군정 장관 존 하지 중장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있었던 옛 총독 관사를 이어받아 관사로 사용하다 다시 대한민국 정부로 인계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집무실 겸 관저로도 이용되었습니다.

그런 제1공화국 시기에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 이름은 조선 고종 때 인재 등용의 현장인 경무대를 계승한 명칭인 경무대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경무대는 1960년 4·19혁명 이후 탄생한 제2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이 독재정권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1960년 12월 30일 푸른 기와(靑瓦)덮은 데서 착안하고 영어 명칭인 ‘Blue House’가 미국의 ‘White House’와 비견될 수 있는 이름이라는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주장에 따라 청와대로 공식 개명되었습니다(현재 청와대의 영문 표기는 Cheong WaDae). 

(좌)대통령 관저 동문 (우)앞 노태우식수 뒤 노무현식수 소나무

이후 청와대는 1968년 1·21 사태(김신조 사건)를 계기로 주변 경비가 강화되면서 북악산과 인왕산 및 청와대 앞길 등의 통행이 제한되기도 했지만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앞길과 경내가 일반인에게 개방되기 시작했고, 이후 현재까지 그 폭이 더욱 확대되고 있습니다.

경복궁의 후원 터이자 총독 관사가 있었던 광화문 1번지는 광복 후인 1946년 세종로 1번지로 개명됐고 대지 면적은 23만980㎡(6만9871평)로 조정되었습니다.

이후 사무 공간의 확대와 경호 및 그와 관련된 건물과 시설을 확충하면서 청와대 경내 대지는 세종로 1번지 이외에 삼청동 157-94번지 외 9필지, 영빈관, 제101경비단, 구 연무관 위치인 세종로 1-91번지 외 17필지, 궁정동 1-2번지 외 43필지 등 3개 동에 걸쳐 총 73필지 25만3505㎡(7만6685평)로 늘어났습니다.

(좌)오운정; 1989년 청와대 대통령 관저 신축 시 이전, 경복궁 후원에 지었던 오운각의 이름을 딴 건물, 서울시 유형문화재 지정과 (우)오운정에서 바라본 대통령관저
미남불- 1912년 경주 도지리 이거사(통일신라)에서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되어 1939년 총독관저를 경무대로 옮기고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신축하며 현재 위치로 옮겨짐.

어떤 이유에서건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캐치플레이즈로  청와대가 개방된지 1년이 넘어 갑니다.

여전히 영빈관은 그때그때 필요하면 영빈관의 역할로 사용되며 사전 통보없이 입장이 막힙니다

단 1년만에 방문객 수는 반도 안됩니다.

이미 20년 전에 개방한 청남대에서도 보인 1년 반토막 방문객 감소는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결국 ‘대통령’관련 이슈는 1년을 버티지 못합니다.

줄어드는 방문객을 잡고자 별별 행사를 준비 합니다.

하다 하다 궁궐 방문에 한복을 대여하는것처럼 청와대 방문객에게 한복도 대여해 준다고 합니다.

수궁터 청와대 구본관과 절병통(節甁桶; 건물에서 지붕이 한곳으로 모이는 지점에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고 때로는 지붕을 장식할 목적으로 지붕 꼭대기에 설치하는 항아리 모양의 기와)

경복궁은 복원 중입니다.

복원대상 건물의 기준시점을 고종대로 잡았습니다.

그 시점이라면 청와대와 그 일대는 경복궁 복원 사업에 포함되어야 할것입니다.

구태여 그 시점을 더 과거로 돌린다면 청와대 부근은 1,000년 전 고려의 남경궁으로 복원해야 하지만 결국 천도를 못한채 미완으로 남았고 조선의 제1법궁인 경복궁과 겹치는 부분이 생기기에 무리가 됩니다.


1990년 부터 시작된 1차 경복궁 복원 사업으로 현재 30%정도 복원되었습니다.

2차 복원은 54000억 투입해 2030년 마칠 예정인데, 76% 완성되는 것이죠.

청와대 등 불가한 건물들이 주저앉아 있는터라 더이상 복원은 불가능합니다.

정쟁의 도구가 아닌 국민품으로 돌려주는 모습은 어떤 방향이 옳을까요?

경복궁과 후원을 연결하는 신무문과 창건과 중건 이후의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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