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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문 CCXXII 설…제 이름 찾는 여정

; 새해에 짚어보는 우리 정신

by Architect Y

2024년 甲辰年 갑진년 1월1일,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 첫날을 흔히 ‘신정’이라 부릅니다.


신정6新正 | 명사

1. 양력 1월 1일.

2. ‘양력설’을 구정(舊正)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구정6舊正 | 명사

1. ‘음력설’을 신정(新正)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2. 음력 정월.


양력-설 陽曆설 | 명사. 양력으로 쇠는 설. 양력 1월 1일을 새해 명절로 이르는 말이다.

음력-설 陰曆설 | 명사. 음력으로 쇠는 설. 음력 정월 초하루를 새해 명절로 이르는 말이다.


설 | 명사.

1. 우리나라 명절의 하나. 정월 초하룻날이다. =설날.

2. 음력설과 양력설을 통틀어 이르는 말.

3. 새해의 처음. ≒세시, 연수, 연시.


여전히 국립국어원 표준국어사전에는 ‘신정’과 ‘양력설’, 그리고 ‘구정’과 ‘음력설’이 올라있는데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 입니다.

이것들은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정책 중 하나로 양력을 강제 시행했던 말이기때문입니다.

보는것과 같이 양력설(1월1일)을 뜻하는 ‘신정’과 음력설을 뜻하는 ‘구정’은 모두 우리 민족 대표 명절인 ‘설날’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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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고종실록 오른쪽 순조실록

음력설이 공식적으로 없어진 것은 1896년 1월1일입니다.

대한제국을 건립한 고종은 이미 힘을 잃어 친일 김홍집 내각의 의도대로 이날부터 태양력을 공식 역법으로 도입했습니다.

왕실의 탄생일을 모두 양력으로 수정했고 왕실의 공식 제사와 축제를 모두 양력에 맞췄지만 그렇다고해서 음력 설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종실록을 보면 지금의 설인 음력 정월초하루를 제삿날의 하나로 삼는 오향대제도 지속됐고, 동지의 신년하례도 계속되었습니다.

반면 양력 1월1일에 대해서는 휴일로 지정했을 뿐 특별한 행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순종 즉위년인 1907년부터 음력 설은 물론 동지 하례까지 폐지되었습니다.

순종실록은 1907년 12월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친일파 이완용이 “국가의 정삭(正朔·1월1일)은 이미 태양력을 준수하여 쓰고 있습니다. 음력 원단(새해 아침)과 동지에 조하하는 의식은 이제부터 하지 않는 것으로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청하자 순종이 이를 허락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07년은 조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이완용 친일 내각이 구성되고 고종이 강제퇴위된 뒤 조선 군대가 해산되는 등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해로 메이지유신 이후 모든 명절과 기념일을 양력으로 바꾸고 완전한 태양력을 시행해온 일본 입장에서 대한제국의 음력 폐지는 효율적인 식민지 지배를 준비하는 과정의 일환이었습니다.


조선을 식민지화한 이후 일제는 음력 설 전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던 모습이 1924년 2월14일 동아일보의 ‘어느 날이 명절이냐’라는 기사에 실린 여느 조선인 학생의 음력 설 풍경이 올라 있습니다.


양력 1월1일을 명절이라 하여서 학교에서는 전후 10여일을 방학도 하여 주지만…여관에서 슬픈 잠이나 자고, 남의 명절 구경이나 한다…그러면 우리 명절날은 아마 또 있나 하고 음력 정월 1일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12월 그믐날이라 하여도 학교에서 내일은 명절이니 하나도 놀라는 말은 없고, 임시 시험을 행하거나(하며) 큰 주의를 준다. 그래서 제석(섣달 그믐날) 밤이라도 부모 형제들과 모여서 신년 맞을 준비도 못하며 친구들과 앉아서 1년 동안 지난간 일을 말하며 웃음 한번 못 웃고 방에서 고적히 시험준비나 하다가 책이 손에 있는 대로 피곤한 잠을 잤었다. 아침에 겨우 떡국이나 한 그릇 얻어 먹고, 잊어버린 듯한 세배 절이나 웃사람에 하고는 책보를 메고 나가면서 오늘 시험에 낙제나 아니하겠나 하고 영어 스펠을 중얼중얼 외우기도 하며 잘못하다가 체조선생에게 뺨이나 맞지 아니할 걱정을 하는 동안에는 명절 생각은 그만 잊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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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2월14일 동아일보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1989년에 이르러서야 공식 명절 대접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1985년 이전엔 음력 설이 공휴일도 아니었죠.


광복 이후 들어선 이승만 정권도 일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6월4일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등 국경일과 식목일, 한글날, 추석, 심지어 크리스마스까지 공휴일로 지정하면서 음력 설은 공휴일에서 제외했습니다.(대통령령 제124호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

반면 양력 1월1일부터 1월3일까지 3일간 연휴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몸과 머리가 기억하는 관습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양력과 음력 2번 모두 쉴 수 없다는 ‘이중과세’ 원칙에 따라 양력설을 공식적인 설 명절 연휴로 지정한 대신 음력설인 구정은 공휴일로 채택하지 않았지만 생일도 음력으로 지내는 한국인의 DNA에서 쉽사리 음력설인 구정 풍습이 사라지지 않았죠.

4·19 혁명 이후 잠시 음력 설에 대한 탄압이 사그라들었지만,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 아래서 음력 설은 다시 핍박 받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처럼 친미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일제에 가까운 친일 근대화론자였기 때문이죠.

1962년 경찰은 설을 앞두고 극장 등에 붙이는 광고물에 “구정프로”라는 문구를 삽입해 강조하는 선전을 금지했고, 교통부는 이승만 정권 때도 운행해 오던 구정 임시열차 증편 운행을 중지해 고향을 떠난 도시 노동자들의 귀성을 막았습니다.

설을 앞둔 떡방앗간 조업 단속도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박통시절 아버지가 공무원인관계로 당연히 양력 1월1일을 설날로 쇠어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설 차례를 음력 1월1일에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공휴일아 아닌데도 부랴부랴 아침 7시에 차례지내고 출근 하셨던 아버지…

전두환 신군부도 초기에는 박정희 정권과 마찬가지로 음력 설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였으나 ‘음력 설 공휴일 지정 여부’가 매년 국무회의에서 논란이 됐다는 점이 달랐습니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 해마다 연초 국무회의에서는 음력 설이 공휴일이 될 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결국 여론에 밀려 1985년 음력 1월1일을 ‘민속의 날’이란 이상한 이름의 공휴일로 지정했습니다.

한반도를 점령했던 일본 제국주의와, 광복 이후 나라를 지배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권은 100년 가까이 ‘음력 설’의 전통을 뿌리뽑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음력 설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신군부가 무너진 뒤 1989년에 이르러서야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각계 각층에서 ‘음력 설’을 복권하자는 요구가 물밀듯이 쏟아졌기 때문이죠.

결국 1989년 2월 정부는 ‘민속의 날’의 명칭을 ‘설’로 바꾸고, 음력 설과 추석을 3일 연휴로 하는 대통령령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했습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정부가 ‘음력 설’을 인정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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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들어 신정 대신 구정을 진짜 설 명절로 되돌리려는 움직임은 민중들은 겉으로는 적응하고 순응하는 척하면서도 끊임없이 저항했고, 100여년의 탄압을 이기고 결국 ‘음력 설’을 쟁취해냈습니다.

그래서 ‘음력 설’은 권력 앞에 한없이 나약해지면서도 끝내 이 땅의 주인이라고 거듭 주장하는 촛불 민심을 닮았습니다.


신정, 구정, 양력설, 음력설은 지금은 많은 사람이 쓰고 있으니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지만, 앞으로 우리가 쓰지 않음으로써 먼 훗날 우리 국어사전에서 사라지게 해야 할 말들입니다.

불합리한 권력에 저항해온 ‘음력 설’의 역사를 기억하며 촛불의 미래를 고민하는 새해가 되길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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