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가위 전 소고기 이야기 spin off
한가위가 바로 앞까지 왔네요.
집안에서 명절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특히 신경쓰고 있는것이 소갈비찜입니다.
그런데, 재래시장뿐 아니라 대형마트나 대형 정육점에서도 명절, 특히 한가위에 찜갈비를 많이 준비하는것은 어째서일까요
그리고 소갈비찜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소갈비를 이용한 전통 소갈비 음식은 무엇일까요
한번쯤 쓰고 싶었던 소고기에 대한 연재에 들어가기 전 마침 명전 전이라 소갈비찜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놔 봅니다.
소갈비찜은 명절 음식으로 익숙하지만, 사실 전통적으로는 제사상에 오르던 제수 음식이라기보다는 근대 이후 발달한 ‘가정 잔치 음식’의 성격이 강합니다
조선시대 제사상에는 주로 탕(국), 적(꼬치구이), 전(부침), 조기 같은 생선, 떡, 나물류가 중심이었고, ‘찜’이라는 형태의 육류 요리는 핵심 제수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제사상에 고기를 올리긴 했지만, 돼지고기, 닭고기보다는 소고기 전골, 산적, 탕 같은 형식이었고, 지금처럼 달콤한 양념에 오래 졸인 갈비찜은 드물었습니다.
곰국을 끓이고 갈비와 염통을 굽고 뱅어저냐까지도 부쳐 놓았다.
…중략…
‘참 그렇습니다. 김치는 음식 중에 내셔널 스피리트(민족정신)란 말씀이야요.’ 하고 그 지혜를 칭찬한다는 듯이 상철을 보고 눈을 끔쩍한다.
상철은 픽 웃고 갈비를 뜯는다.
‘갈비는 조선 음식의 특색이지요.’ 하고 어떤 학생이, ‘갈비를 구워서 뜯는 기운이 조선 사람에게 남은 유일한 기운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응, 그런 말이 있지.’ 하고 한선생이 갈비를 뜯던 손을 쉬며, ‘영국 사람은 피 흐르는 비프스테익 먹는 기운으로 산다고.’ 하고 웃었다
- 흙 제1장 13절, 이광수
1932년 4월27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던 이광수님의 연재소설 「흙」에 실렸던 내용으로 조선 청년의 교육 지도를 일생의 업으로 삼고 살아온 한민교의 집에서 제자들과 만찬 중 이들은 음식에 국민성이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끝이 보이지 않았던 193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무겁게 지고 있었던 고뇌가 갈비구이에 담겨 있습니다.
갈비라는 이름도 한자어로 시작되었는데 대중들에게 익숙한 말은 가리 였습니다.
한자 표기 乫非는 ‘갈비’의 한자 음차이며, 조선 왕실 기록과 요리서 등에서 갈비찜, 가리구이 등 다양한 형태로 등장합니다.
1600년대 이후 문헌에서 ‘갈비(乫非)’라는 표기가 확인되며, 1700년대 이후 왕실 제사상, 궁중 진찬 등에서 실제로 사용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517년, 고려 말 중국어 학습교재로 추정되는 노걸대 老乞大를 최세진이 한글로 언해하면서, 협조脇條를 ‘녑발치’라고 번역했고 그 후 ‘갈비(乫非)’라는 표기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일부에서 1604년 중국사신을 영접하며 기록된 영접도감 ‘소선상(小膳床)’에서라고 이야기 하기도 하는데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영접도감의궤는 1608년~1610년에 걸쳐 제작된 「영접도감도청의궤迎接都監都廳儀軌」이며, 이 의궤에서 ‘갈비乫非’라는 표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정약용은 어원 연구서인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우협牛脅을 갈비曷非라고 부른다고 이야기 했지만 19세기 말 이후 1920년대 초반에 나온 한글 요리책에서는 갈비라 하지 않고 ‘가리’라고 적었습니다.
1890년대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요리책 「시의전서是議全書」 에는 ‘갈비(乫飛)’라는 이름과 함께 ‘가리찜’의 요리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협(牛脇)을 ‘갈비(曷非)’라 하고 갈비에 붙은 고기에서 고기만 떼어서 파는 것을 ‘갈비색임’이라 하는데, 이것으로 국을 끓이면 맛이 매우 좋다. 그리고 갈비 끝에 붙은 고기를 ‘쇠가리’라고 하는데 이것을 푹 고아서 국을 끓이면 좋다. - 아언각비
가리를 두치 삼사푼 길이씩 잘라서 정히 빨아 가로결로 매우 잘게 안팎을 어히고(자르고) 세로도 어히고 가운데를 타(갈라) 좌우로 젖히고 가진(갖은) 양념하여 새우젓국에 함담(간) 맞추어 주물러 재여 구어라 - 시의전서
혼용해 오던 명칭은 1809년 규합총서(한글 조리서), 1849년 동국세시기(세시풍속서)등에서 이 시기를 거치면서 ‘가리’보다는 ‘갈비’가 점점 널리 쓰이기 시작했고 9세기 말~20세기 초 신문, 잡지, 근대 요리책에는 거의 ‘갈비’라는 표기가 정착하며 일제강점기 이후 정육점, 요릿집, 신문 광고에서도 ‘갈비찜, 갈비탕, 갈비구이’가 표준 표현으로 굳어지며 ‘가리’는 방언, 옛말로만 전승되고, 국어사전에도 주로 ‘고어, 방언: 갈비’로 수록되었습니다.
갈비찜의 형태가 보이기 이전 소갈비의 기록으로는 주로 탕과 구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소고기가 귀하던 시절인지라 주로 궁중요리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궁중외에서 소고기를 잘 먹지 못했다라는 부분은 다음 연재에서 반전 이야기로 적어 보겠습니다 - 왕실 잔치 음식 목록을 적은 의궤 중 정조, 고종 연간의 궁중 진연 기록인 ‘진찬의궤 進饌儀軌’에서는 ‘갈비탕’, ‘패골탕’, ‘육전골’ 등이 등장하는데 특히 진찬례(進饌禮, 왕실 연회) 음식상에 소갈비탕이 주요 국물요리로 올라 있습니다.
규합총서에는 갈비 관련으로 소갈비를 푹 고아 기름을 걷어내고 간장·파·후추로 맛을 낸 패골탕(排骨湯)이 소개되며 병자, 노약자에게 좋다는 효능 기록도 존재합니다.
현존하는 가장 방대한 조선 후기 조리서인 시의전서에는 ‘갈비탕’·‘갈비구이’ 조리법이 수록되어 있는데 갈비를 구워 먹는 방식(양념+숯불)과 탕으로 끓이는 방식이 모두 있습니다.
동국세시기에는 직접적으로 ‘갈비찜’은 없으나, 설날·추석에 갈비탕이 쓰였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排骨湯, 肉羹, 雜饌, 餠果… - 진찬의궤
排骨湯: 牛排骨洗淨. 沸水湯煮. 去沫. 投薑, 蔥, 鹽少許. 煮爛去油. 益以胡椒. 爲病後進膳.(패골탕은 소갈비를 깨끗이 씻어 끓는 물에 넣어 끓이는데 거품을 걷어내고 생강, 파, 소금을 조금 넣고 충분히 무르게 익힌 뒤 기름을 걷고 후추를 더한다. 병후, 즉 병이 회복 중인 사람에게 내는 보양 음식이다.) - 규합총서
牛排骨細切, 醬油, 蔥白, 蒜, 薑, 油, 酒和味, 漬之片時, 以炭火熟炙之.(소갈비구이는 소갈비를 잘게 썰어 간장, 파, 마늘, 생강, 기름, 술로 맛을 내어 잠시 재워 숯불에 구워 익혀 먹는다)
排骨湯: 用牛排骨, 蔥, 薑, 醬, 煮之. 取湯爲食 (갈비탕은 소갈비에 파, 생강, 간장을 넣고 푹 끓여 국물로 먹는다.) - 시의전서
正旦之饌, 設湯餠, 排骨湯, 餠餌…(설날 차례상과 세시 음식으로 떡국(탕병), 갈비탕(패골탕), 떡과 과자를 올린다.) - 동국세시기
그렇다면 오늘의 주인공인 갈비찜은 언제부터 기록이 남아 있고 명절음식의 대명사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선시대의 갈비찜을 한자로 갈비를 쪄서 만든 음식이라는 뜻의 갈비증(乫非蒸)이라고 표기했는데 정조실록에 정조 19년(1795) 6월 18일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進饌 진찬)에 갈비증(乫非蒸)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갈비찜이 조선 후기 왕실의 중요한 잔치에 오르던 귀한 음식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현재의 갈비찜에는 갈비만을 사용하지만 조선시대부터 1920년경까지는 소위, 곱창, 양 등 다양한 부위의 내장을 함께 넣어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시의전서의 조리법에는 한 치 길이로 자른 갈비와 함께 소위, 곱창, 무, 다시마, 표고, 석이, 파, 미나리가 들어갑니다.
방신영의 1921년 「조선요리제법 朝鮮料理製法」에서는 갈비 외에도 양, 곤자소니(소 창자의 맨 끝 부분), 부아(폐), 창자 등의 다양한 부위의 소 내장이 함께 사용되었으며 미나리를 꼬지에 꿴 뒤 달걀 물을 입혀 부친 음식으로 고명의 일종인 ‘미나리 초대(미나리 적)’와 표고버섯, 석이버섯도 들어갔습니다.
남비 안 밑에다아가 삶아낸 무를 두고 그 위에다 양념에 주무린 삶은 갈비를 놓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고기완자·전유어완자를 지져 넣고 석이·표고, 계란 흰자위 노른자위를 각각 채쳐서 부스러지지 않도록 놓은 후에 은행 목근 것, 호도 찜질멧긴 것, 잣, 실고초를 각각 보기 좋게 얹고 갈비 삶은 물에다 밀가루를 한 숟가락쯤 두고 저으면 약간 걸쭉하게 됩니다.
밀가루를 풀 때엔 멍울이 지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국물을 붓거든 다시 한 번 끓리여 먹습니다.
- 만하여사담, 중외일보 1929년 11월10일
1920년대 이후 갈비찜은 요리옥에서 신선로 다음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고급음식이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갈비찜의 성황은 계속 이어는데 외국 사절을 접대하는 연회에서나 요정에서나 명절 가정 요리로 갈비구이보다는 갈비찜이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로 인해서 소갈비는 명절 선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전후의 황폐했던 경제가 제법 안정 상태로 들어선 1960년대가 되면 명절을 앞두고 소갈비 판매가 그 절정에 달하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줄을 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절에는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소갈비를 구입하기조차 어려워져 결국 암소나 황소나 구별하지 않고 비싼 가격을들여 구입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제의 성공은 한국인에게 조선시대 이전부터 가장 먹고 싶은 소고기에 대한 욕구를 증대시켰던것입니다.
자고로 명절에는 상호우의를 돈독히 한다는 의미에서나 혹은 윗사람들에 대한 예절로서 오고가는 정표로 소갈비를 거래하는 것이 풍습화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소갈비가 오가는 과정에서 아부아첨으로 진상이라는 표현으로 통하고 있는 것이 요즘 소갈비를 바치는 칭호가 되어 있다.
- 매일경제 1966년 9월28일
조선시대 갈비찜은 왕실·귀족의 잔치나 연회 음식으로 쓰였고 추석에는 닭찜을 먹었는데, 닭찜 대신 갈비찜을 쓰기도 한다는 기록으로, 갈비찜이 절식(명절 음식)에 예외적으로 쓰였다가 근대이전부터 일제강점기에는 소고기, 특히 부위별 정육 체제가 발달하면서 갈비를 따로 쓰는 문화가 형성되었지만 일반 민중에는 접근 어려움, 일부 상류층이나 서울 중심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후 1960년대 전후 복구기에는 전반적인 식생활 변화와 함께, 육류를 먹는 문화가 확대되며 갈비 요리 대중화의 토대 마련됩니다.
1970년대 여성잡지, 신문 요리면 등에서 명절 상차림 특집에 갈비찜 레시피가 실리기 시작한 것으로 명절상 메뉴로 갈비찜 자주 등장하고 1980~1990년대 이 시기부터 식품회사, 정육업체, 대형마트가 명절 갈비 선물세트, 명절 갈비 요리법 등의 광고를 내며 갈비찜을 명절 대표 메뉴 이미지로 활용하기 시작하는데 드라마, 요리 방송 등에 명절 날 갈비찜 장면이 빈번히 등장하면서 문화적 고착이 시작되고 21세기에 들며 명절 음식 브랜드, 유통 채널(백화점, 마트, 정육점)에서 명절 소갈비찜은 당연한 메뉴로 기획되고 명절 전후 요리 콘텐츠, 블로그, 유튜브 레시피도 갈비찜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연스레 제수(祭需)가 아닌데 명절음식으로 고착된 소갈비찜은 잔치 때 손님을 대접하는 최고의 요리 중 하나였고, 명절 또한 온 가족이 모이는 큰 잔치나 다름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명절 상의 메인 요리로 채택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최고의 맛과 대접을 선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안의(함양) 등 특정 지역에서는 소고기 관련 산업(우시장, 도축장 등)의 발달과 함께 갈비 요리가 향토 음식으로 발달했으며, 이것이 명절 음식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소갈비는 가격대가 높은 식재료이므로,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워 명절에 먹는 귀한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요리이므로, 이를 함께 준비하거나 맛있게 나눠 먹는 행위 자체가 가족 간의 사랑과 풍요로움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명절의 푸짐함과 넉넉함을 대표하는 음식인 셈입니다.
부드러운 육질, 달콤하고 짭조름한 양념이 주는 깊은 감칠맛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선호도가 높습니다.
요약하자면, 소갈비찜은 전통 제수의 격식과는 별개로, 한국의 경제 성장기 이후 명절의 풍요와 가족에 대한 정성을 상징하는 고급 잔치 음식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명절 대표 음식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그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게 된 것입니다.
글을 쓰는동안 찜통에서 소갈비가 익어갑니다.
개인적으로 어머니의 소갈비찜을 흉내내기도 하지만 수입갈비-LA갈비(육우의 제1 늑골에서 제5 늑골 사이의 갈비로 늑골의 폭이 좁고 근육이 많다)로 찜을 가끔하는데 올해는 LA갈비찜을 준비했습니다.
다음, 소고기 연재에서 맛있는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