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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27. 2016

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III 제주의 비경 추사 적거지

수선화의 향에 취하는 봄날의 秋史추사 謫居址적거지

화순옹주는 자식이 없으니 조카 김이주를 양자로 들인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양아들 김이주를 편애하니 형조판서에 이른다.

영조의 외손자 김이주의 막내아들인 김노경(1766-1837)은 기계 유씨와 결혼해 월성위궁에 신혼살림을 차린다.

임신 중인 기계 유씨를 고향인 예산군으로 내려가 몸을 풀게 한다.  

1786년 장남을 낳는다.


추사 김정희.

호는 추사秋史(가을에 글을 쓰는 글쟁이).


그래 충청도 오지 예산군은 추사고택을 문화유산으로 갖게 된다.

완당阮堂. 호만 100개.

완당은 중국의 대문장가 완원(1764-1849)이 직접 내려준 호다.

1800년 한산 이씨와 결혼하지만 1805년 정부인 20살로 생을 마감한다.

1808년 예안 이씨와 재혼. 현모양처(賢母良妻 어진 어머니이면서 착한 아내)로 집안에 평화를 가져오나 아이를 못낳는다. 1808년 성균관의 입학시험인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해 예비교육을 10년간 받고

1819년 드디어 대과에 합격 관료의 길로 접어든다.

첩을 들여 서자 김상우를 낳지만 족보에 올릴 수가 없어 김상무를 양자로 들여 대를 잊는다.

1826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발령받아 錦衣還鄕 금의환향한다.

1830년 윤상도(1768-1840)는 당시 호조판서이던 박종훈(1773-1841)을 탐관오리라 규탄하다가 추자도에 위리안치된다. 그래 역풍을 맞는다.

1840년 안동 김씨는 병조판서 추사가 눈의 가시다.

10년 전 윤상도의 상소문을 추사가 초안한 걸로 꾸미고 윤상도는 결국 1840년 유배지에서 의금부로 압송되어 아들과 함께 능지처참당하고 고향집에서 자고 있던 추사도 의금부로 압송, 제주도 유배간다.


1840년 9월 27일 제주도 가는 배 올라 제주도 화북(원래 탐라국의 도읍이었으나 938년 고려의 속국이 된다) 도착한다.

교리(校理 종 5품의 선비) 송계순의 집에 기거한다.

다시 한라산을 넘어 대정으로 가 1년 후 더 큰 집인 교리 강도순의 집으로 옮긴다.

그래 이 집은 추사학당이 되고 추사체를 완성한다.

1946년 4.3 사건 때 불에 탄다.

1984년 후손의 고증에 의해 복원된다.

누마루로 진입하면 제주도식 초가 4채가 보인다.

정낭 지나 안마당에 들어서니 안채, 바깥채, 별채, 통시(제주도식 화장실)이 ㅁ자 마당을 만든다.

1844년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세월을 그려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 국보 188호) 완성한다. 린다.  

가로 69.2㎝, 세로 23㎝.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해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준다.

온갖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를 거부하고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표현한 명작.  

1848년 9년 만에 제주도에서 돌아오지만

1851년 또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 간다.

1824년 추사는 청계산 옥녀봉 일대에 부친의 묏자리를 잡고 그 아래 경치 좋은 곳에 별장인 과지초당瓜地草堂을 마련한다. 1838년 부친 김노경이 돌아가시자 옥녀봉에 모시고 3년 복상(服喪 상중에 상복을 입음)을 이곳 과지초당에서 지낸다.

그래 과천일대에 추사의 글씨가 여러 암반에 새겨지게 된 거다.

1853년 북청에서 돌아온 추사는 옥녀봉의 과지초당에 은거하면서 삼성동 봉은사에 다니고 1856년 청계산에 묻힌다.

봉은사에 판전板殿이라는 편액을 남긴다.

추사 김정희의 수선화 사랑은 아주 유명하다.

당시 수선화는 요즘처럼 흔히 볼 수 없는 꽃이 아니어서 아주 귀했다 한다.

중국의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가져와 아는 지인들에게 선물용으로 쓰였을 정도라니...

그런데 추사는 제주에 와서 깜짝 놀라고 만다.

그토록 귀이 여겼던 수선화가 지천으로 피어나고 심지어 농부의 호미에 파이고 뜯기기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겨울과 봄 사이의 대정향교에서 추사적거지로 거닐다 보면 가장 반가운 존재는 수선화다.

추사유배지와 대정향교, 그저 탱자나무 아래 몇 그루의 녹차나무와 담장 아래 수선화 몇 포기가 피어 있을 뿐이지만, 한국에서 가장 기품 있는 봄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옛 문인의 삶에 취하고 이제 갓 시작된 봄에 취하고 수선화의 향에 취한다.

한 점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어라

그윽하고 담담하고 영롱하게 빼어났네.

매화가 기품이 높다지만 뜨락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맑은 물에서 참으로 해탈한 신선일세

- 추사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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