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역사 읽기 III 조선사

다섯. 실학자(?) 정약용 1/7

by Architect Y

정약용이 실학자 일까, 그럼 實學실학은 뭘까?

; 다산 정약용 prologue


성리학이 허학이며 실학에 대치된다는 말은 어디서 부터 출발 한걸까.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조선 후기 사회에서 나타났던 새로운 사상으로 당시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성리학의 관념성과 경직성을 비판하며 경세치용과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학문 태도를 강조했다.

17세기~19세기에 걸쳐 조선 후기 사회에서 柳馨遠유형원, 李瀷이익, 丁若鏞정약용, 朴趾源박지원, 洪大容홍대용, 朴齊家박제가, 金正喜김정희, 崔漢綺최한기 등을 중심으로 나타났던 유학의 새로운 학풍이자 사상 조류를 가리킨다.

여기까지가 우리학 초중고를 거치면서 자연스레 배워온 實學실학에 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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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성리학에의해 썩은 조선을 구하는 구세주역활임을 보여주기 위해 내세운 이론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실학이 江戸時代에도시대에 서구의 과학ㆍ기술의 수용을 강조하고 비실용적인 성리학을 비판하며 나타난 새로운 학문 경향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조선의 건국철학이었던 성리학을 이른바 虛學허학이라고 치부하며 空理空論을 타파하는 현실적인 학문이라 배워왔다.

하지만 정작 성리학은 실학과 대치되는 내용은 없다.


朱熹주희는 老莊思想노장사상과 불교를 ‘무용한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中庸중용의 가르침을 실학이라고 하였다.

또한 고려 초기에 崔承老최승로는 유교를 불교에 견주어 실학이라고 하였으며, 고려 말기에 불교 비판에 나선 성리학자들도 도교와 불교를 허무와 적멸에서 진리를 찾는 허학이라고 비판하며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강조했다.


다산 정약용을 실학의 거두로 생각한다.

499권의 책에서 다산이 직접 실학이라고 딱 한 번 썼다.

그 뜻은 오늘날 實學실학이란 뜻이 아니라


잊어버리기 쉬운 것들을 잊지 않는 비법을 알려 주면서 '헷갈리지 않게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실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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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뜻이다.

또한 實事求是실사구시라는 말은 後漢書후한서에서 나온 말이다.

이걸 청나라 초에 고증학을 표방하는 학자들이 성리학이 공리공론을 일삼다고 주장하며, 송, 명대의 학문을 배격하여 내세운 표어인거고.

그러나 이들은 철학이란 원래 공리공론임을 모르고 있었으며, 더구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공리공론에 빠지지 않았다.


초중고 16년간 배워온 역사책을 버리지 않는다면 사실과도 멀어질 수 밖에 없다.

극우로 치우치게 되는것이다.

1944년 마지막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阿部信行あべのぶゆき아베 노부유키는 패망 후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내 장담하건데, 조선 국민이 제 정신을 차려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단군)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 국민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 국민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단군)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일본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해방과 함께 역사학계는 친일 학자를 강단서 쫒아내고 식민사관의 뿌리를 근절해야 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무산되고 박은식, 신채호 선생에 이어 민족주의 사학자인 안재홍, 정인보 선생이 떠나면서 그 공백을 친일학자들이 채우게 된다.

조선사편수회에서 맹활약한 이병도와 신석호는 각각 서울대, 고려대 교수로 들어가 제자를 양성하게되고.

강력한 식민사관으로 무장된 교육자들과 이승만대통령의 어설픈 토지개혁으로 친일의 어마어마한 자금은 사학으로 흡수되어지고.

여전히 뿌리가 강력히 내려진 식민사과, 반도사관의 서울대 학생들에 의해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책이 만들어지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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