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의 역사 읽기 IV 근현대사

세번째. 광복에서 분단까지 03 2.7 구국투쟁

by Architect Y

946년 6월 미국무장관 마샬은 소련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비난하면서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남한에서 독자적인 계획을 추진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1947년 5월 21일 서울 덕수궁에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되자 모스크바 협정의 실현만이 조선에 민주주의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던 조선 민중들은 1947년 7월 27일 남한전역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주최로 「임시정부 수립 촉진 인민대회」를 열었다.

노동자,농민,학생,시민등 각계각층의 애국적 민중들이 전국적으로 모여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하나. 통일적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단시일내에 수립하자면

모스크바 삼상 결정을 정확히 실천하는 미소 공동위원회를 성공시키는 이외에는 없다.

하나. 이승만 일파의 미소 공위 파괴 공작 때문에 위기에 봉착했다.

때문에 어느 때보다 공위 사업에 협조하는 임무가 제기된다. 죽음으로써 수호하여 성공시켜야 한다.

하나. 인민 자위의 법적 승인을 강경하게 군정 당국에 요청하는 동시,

여운형 참살을 계기로 전개된 구국운동을 힘있게 추진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남조선에서 민전 단체가 협의대상의 50%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하나. 수립될 임시정부는 인민위원회 정부 형태인 조선인민공화국으로 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 임시정부는 인민의 지지를 받는 애국자로 조직할 것.

하나. 임시정부는 토지개혁, 산업국유화, 남녀평등권 제도 등을 실시할 것.


그러나 미국의 사주를 받은 이승만 일파의 방해 책동과 임시정부 구성을 위한 협의대상에 대한 미,소간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지지부진하게 답보상태를 거듭하던 공위는 미국의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의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세우자


는 제안과 함께 1947년 9월 8일 미,소,영,중 4개국이 워싱턴에서 만나 모스크바 협정을 대신할 새로운 방법을 검토하자는 미국의 주장에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 20일 시작되어 한국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채 1년반만에 끝나고 말았다.

한국의 통일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유일한 방법이었던 모스크바 삼상 결정이 무산되면서 통일된 민주주의국가건설이라는 전체 조선민중의 염원은 영원히 물건너 가게 된 것이다.

제2차 공위가 무산되자 미국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방침을 더욱 굳히고,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유엔에 계획대로 1947년 9월 정식으로 상정하였다.

이승만 일파의 반민주 세력을 제외한 노동자,농민,학생,시민 등 애국적 조선민중들과 애국적 제정당들은 9월 5일 조선문제의 유엔상정은 민족분열을 영구화 시킬 위험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면 조선 문제의 유엔상정에 대한 반대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어 9월 30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미,소 양군의 동시 철군을 주장하였고,

10월 18일에는 근로인민당, 사회민주당, 민주한독당, 민중동맹, 신진당 등이 공동성명을 통하여 미,소 양군의 철수, 통일정권을 자주적으로 수립하기 위한 전국적 총선거 준비기구의 구성,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의 남북교류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조선문제 해결을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설립을 제안하여

1947년 11월 14일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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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총선거를 실시하고

여기에서 선출된 대표로써 통일정부를 구성 한다


는 미국의 원안대로 유엔 총회에서 통과시켰다.

총선거 감시를 위한 유엔 임시위원단은 최소한의 공정성마저도 확보하고 있지 못하였다.

미국과 소련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나라의 대표들로 구성되어져야 마땅하나 유감스럽게도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9 개국 (호주, 캐나다, 중국(장개석 국민당 정부),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립핀, 시리아, 우크라이나)중 우크라이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미국의 동맹국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같은 유엔 총회의 결의안을 북한과 소련이 받아 들이지 않았고 미국은 애초에 한국문제에 관한 유엔 총회의 결의안이 북한과 소련에 의해 받아들여질 것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라 미국은 유엔이라는 간판을 내세움으로써 모스크바 협정의 파탄과 이후 한반도의 분열에 대한 책임을 소련에 뒤집어 씌운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할 수 있는 명분을 획득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1948년 1월 6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미국의 밀명을 받고 한국 땅에 발을 들여 놓았다.

미국은 유엔을 앞세워 계속하여 다른 회원국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남한만의 단독선거 음모를 계속하여 획책하였다.

이에 격분한 한국 민중들은 1948년 2월 7일 새벽에 일제히 봉기하였다.


2.7 구국투쟁.

구국투쟁본부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하나. 조선의 분할침략계획을 실시하는 유엔 조선위원단을 반대한다.

하나. 남조선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다.

하나. 양군 동시철퇴로 조선 통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인에게 맡기라.

하나. 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반동파를 타도하자.

하나. 노동자, 사무원을 보호하는 노동법과 사회보험제를 즉각 실시하라.

하나. 노동임금을 배로 올리라.

하나.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하나.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라.

하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산하 30만명의 노동자들은 일제히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2월 7일 새벽을 기하여 서울 영등포, 대전, 대구, 군산 등지를 비롯한 남한 각지의 체신관서에서는 기계 파괴, 전화전신 절단사건이 일제히 발생하여 남한 전역의 통신망이 순식간에 마비되었고, 부산, 대구, 대전, 안동 등 주요 철도기관에 소속된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으로 인하여 기차의 운행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전기 부문 노동자들 또한 파업을 단행함과 동시에 송전을 중단시키는 조치를 취했으며 전국의 각급 학교도 일제히 동맹휴학을 선언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러한 투쟁은 남한의 도시와 농촌 전지역에서 일제히 전개되었으며 투쟁에 참여한 인원만도 200만 명이 넘었다.

한국 민중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하여 난관에 봉착한 미국은 오로지 강압적이고 살인적인 폭력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실현하고자 사력을 다하였다.


2.7 구국투쟁에 참여하였던 한국민중들은 미 군정의 살인적인 폭력에 의하여 100여명이 무참히 학살되고 8,500여명이 검거, 투옥되는 희생을 강요당 해야만 했다.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2.7 구국투쟁을 시작으로 농촌에서의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장기 항전의 태세로 돌입하게 되었고 급기야 4.3 제주항쟁을 필두로 한 전면적인 무장봉기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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