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chitect Y Feb 08.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 강원 객사문

하나. 강릉의 대표인문, 객사문

江陵 강릉(강과 큰 언덕이 많은 동네)

강릉을 가면 들려야 할곳은 객사문, 선교장, 오죽헌, 허난설헌 생가, 경포대다.


918년 왕건은 고려를 개국하며 훈요 10조를 발표하는데,

그 내용중에 공주 은강 아래를 조심하라는 내용이 있다.

그래서 전라도는 1천년 동안 왕따가 되고...  


왕건이 東原京동원경(: 동쪽 멀리 있는 수도 강릉)을 찾았다.

워낙 奧地오지(: 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대륙 내부의 땅)라 왕건이 잘 데가 없다.

936년 객사

(: 왕명을 전하는 신하들이 자던 여관으로 외국 사신들도 재우고, 왕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전각  殿牌<전패; 왕의 초상을 대신해 봉안하던 목패木牌로 '궐闕'이라 씌여 있고 “. 왕에 대한 예우를 위해 각 지방의 관리들은 매달 1일, 15일 정기적으로 망례望禮를 올려야 한다. 망례는 멀리 북쪽에 계신 왕을 향해 예를 표하는 거. 자고 일어난 사신들도 아침저녁으로 북향 사배>를 모시는 관계로 관찰사(지금의 도지사)가 머무는 동헌보다도 더 중요한 건물.)  건립.

3백여 년 뒤 고려 제 31대 왕 공민왕이 강릉을 찾았다.

직접 현판을 썼다.


任英館(임영관; 풀과 숲의 집)

殿大廳(전대청: 커다란 관청)에 현판을 걸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은 일본에게 넘어가고 선비 민영환 자결한다.

1908년 일본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강릉을 찾았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강릉객사는 강릉공립보통학교가 되고 이제 강릉객사에서는 '천황폐하 만세' 복창소리만 들린다.

길 건너 강릉 향교(고려 충선왕 5년,1313년에 처음 세운 후 조선 태종 11년, 1411년에 화재로 없어진 것을 태종 13년, 1413년에 다시 지었다. 화부산 아래 경사진 곳에 위치하여 위쪽에는 제향공간인 대성전-보물 제214호-을, 아래쪽에는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배치한 전학후묘.

제향공간에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무와 서무가 있고, 이를 연결하는 회랑이 있다.

명륜당은 2층 누대 형식의 건물로, 아래층은 기둥만 세우고 벽을 쌓지 않고 통로로 이용한다.

강릉시 유형문화재 제 99호.)에서는 유생들이 침묵 속에 머리를 조아리고.   


임영관 철거.

야밤에 강릉 유지들이 들이 닥쳐 당시 강릉에 지어진 센 한옥들은 임영관의 폐자재로 다시 살아난다.

뒤늦게 통천군수를 지낸 이봉구도 야밤에 객사를 찾아 폐자재들을 수레에 싣고 경포호앞으로 갔다.

放海亭(방해정; 방해정은 1859년 선교장(船橋莊 중요민속자료 5)의 주인이자 통천군수였던 이봉구가 지은 건물.

당시는 선교장의 부속건물이었으나 지금은 박연수가 소장.

放海亭이라는 현판 글씨는 서승보가 썼다.

예전에는 집 바로 앞이 호수여서 대청마루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놀았으며, 배로 출입.

1940년 이봉구의 증손 이근우는 주변을 금잔디로 가꾸고 이가원이라 이름 붙이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강원도유형문화재 제50호 ) 건립하고 강릉객사문만 살아남아 학교 정문이 된다.  

1957년 이제 강릉객사터는 강릉경찰서가 된다.

1962년 문화재청 관계자가 용강龍岡동을 찾았다.

강릉객사문만 달랑 국보 제 51호 지정하여 강원도 유일의 국보가 된다.  

1992년 버려진 땅 객사 터를 파기 시작한다.

시청사를 짓기위해 포크레인들이 찍고 대지 땅속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객사 기초로 사용한 돌들 즐비하다.

중단.

예산 만드는데 다시 6년 걸린다.

1998년 강원도 박물관 팀 도착해 임영관 흔적 확인한다.

2000년 일단 3500평만 55억 투입하고 복원공사 시작한다.

2007년 전대청, 중대청(왕의 위폐를 모시고 북향사배 하는 방), 동대청(종 2품이상 숙소), 서헌(종 3품이하 숙소) 완공한다.  

준공식.

객사문에 걸려 있던 임영관 현판 전대청으로 옮겨 달았다.

173억 투입. 주변 우체국, 방송국 땅 사들여 동헌을 비롯한 당시 관청들 복원공사 착수.

이제 우린 2009년 대지 1만 2천여 평에 이르는 문화재를 갖게 됐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