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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09.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I 경기 동래정씨 동래군파종택

하나. 얼마남지 않은 수고권의 전통가옥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수도권 지하철 대야미역에서 내려서 도보로 2km 움직여서 갈치저수지.

대야미역에서 도보로 20분!  


군포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 95호.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24-4.



조선조 문신 정광보가 이 마을에 들어 온 건 1500년 경.

정광보(1457~1524) 본관은 동래.

동래정씨는 정씨 집안 중에서 가장 큰 문벌을 형성했다.

조선시대에는 왕손인 전주이씨(22명), 세도정치를 펼친 안동김씨(19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정승(17명)을 배출.

그 외에도 대제학 12명 판서 20명에 문과급제자만 198명을 배출한 명문가.

주요 인물로는 여섯 임금을 섬기면서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이 있으며, 영의정을 지내고 기묘사화 때 신진사류를 구하는 데 힘쓴 정광필, 선조 때 만민평등의 대동세상을 추구한 혁명가 정여립,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존겸, 일제강점기 때 국학자였던 정인보 등이 있다.

선조 때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가문이 된서리를 맞아 몰락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정여립은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이이와 성혼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았다.

하지만, 수찬이 된 뒤 이이를 배반하고 동인편에 가담하여 이로 인해 선조의 미움을 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그는 서인의 미움을 집중적으로 받았으며, 관직을 얻지 못하였다.

동인에서는 영향력이 높았다.

특히 전라도 일대에서 명망이 높았다.

그는 진안 죽도에서 모반을 꿈꾸지만 걸렸다.

그는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들자 자살. 이로 인해 처형된 동인 인사는 이발을 비롯하여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정여립.

'천하는 공물로 주인이 따로 없다. 누구든 임금이 될 수 있다'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고, 전라도는 ‘반역향’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그 이후 전라도 출신 젊은이들은 과거급제가 안된다.


지금도 전라도는 '반역향'이라는 잔재가 남아 있고, 동래정씨 정동영이 대선에 도전하지만 실패했다. -_-;;

그래도... 집은 부동산이 아니다.

가문의 정신을 후손에게 고이 전해 주어야하는 인문학의 상징일 뿐.

안채는 1783년, 사랑채는 1877년 건립. 이 종택이 소재한 속달동 일원은 군포시의 도시개발사업에 따라 개발계획 착수.

하지만 종손과 일가족이 18대째 내려오는 종택과 이에 속한 대지ㆍ전답이 영구히 보존되어야 한다고 뜻을 모으게 되었고, 이를 위해 공시지가 35억2천만원 상당인 이들 부동산을 문화유산국민신탁에 무상증여.

시가는 80억이 넘는다는.

이에 따라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종택을 포함한 인근 대지와 전답에 대한 소유권을 갖게 되며 종손 일가족은 증여한 종택과 인근 대지ㆍ전답을 보전하며 가꾸게 된다.

이 집안의 학문이 높다.

팔아 먹고 나누다가 싸우고 의 상하고 하는 집안이 태반인데,  9남매 중 맏아들로 17대 종손인 정성수.

 

“대대로 벼슬을 하며 녹봉으로 땅을 받았던 것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우리 것이 아니며 많은 사람을 위해 써야한다고 아버님께서 늘 말씀하셨다. 요즘은 농토를 농사가 아닌 투자를 위한 수단으로 보는데 농토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공동체도 유지될 수 있다. 형제들이 이런 문제의식에 뜻을 모았다”


이상해 교수.


호남 영남 등 남부 지방에는 전통 가옥이 많이 남아 있는 데 비해 경기 지방 전통 가옥은 6ㆍ25전쟁 중 대부분 타 버려 남은 게 별로 없기 때문에 그만큼 보존 가치가 큰 고택이다. "


7년 전부터 종택을 공적인 공간으로 만들자고 뜻을 모았다는 9남매는 종택 일대가 군포시의 재개발 계획에 편입되자 토지 보상금을 포기하고 기증을 결심했다.

대대로 농사짓고 살아온 땅이 없으면 종택의 역사도 온전히 전할 수 없다고 판단, 땅을 함께 내놓아 농업과 농촌 공동체를 살리는 터전으로 삼자고 뜻을 모았다.

9남매 중 농사를 짓는 둘째, 셋째 아들이 앞장섰다.

둘째 아들 정준수씨는 청년 시절 가톨릭농민운동을 했고, 셋째 아들 정용수씨는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다.

형제는 자연을 해치지 않는 친환경 생명농업을 실천해 왔다.

전국귀농운동본부는 종택 안에 사무실을 두고 주변 토지를 귀농교육과 텃밭교실 실습장으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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