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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10.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II 경상 추원재

하나. 밀양을 중심으로 성리학 사림의 이야기 01 추원재

밀양을 중심으로 좌 안동 우 함양으로 이어지는 성리학 사림의 이야기

; 그 첫번째 마을 밀양 하나. 추원재

밀양密陽.

따스함이 넘쳐나는 마을.

밀이 미리(美里, 아름다운 마을)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옛말로 용을 '미르'라고 해서 용의 벌판이라는 뜻도 있는데 시에서는 이걸로 밀고 있다.

성리학의 전수자 김종직의 마을. 김종직 선생의 고향이 밀양이다.


追遠齋 추원재.

경남문화재자료 제159호.


조선시대 성리학(性理學) 전수의 시조인 강호(江湖) 김숙자가 1389년 처음 거처를 정하였고, 성리학의 거두인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이 태어나 자라고 죽은 집터다.

밀양 제대사거리에서 점필재로를 따라가다가 추원재길로 조금 이동하면 도착한다.

김숙자.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1389-1456).

본관 선산.

인구 11만으로 김 씨 중 서 열 8위.

문과급제자 80명 배출한 명문가.

호는 강호산인江湖山人. 강과 호수와 산과 함께 놀겠다는 뜻으로 스승은 길재(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두나라를 섬길 수 없어서 낙향한 성리학자).

그래서 동방의 성리학은 안향선생에서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숙자에게 전해지고 김숙자는 아들 김종직에게, 김종직은 김굉필金宏弼과 정일두鄭一竇에게 다시 이언적, 이퇴계로 전수된 축이 된다.

고려 말 충신.

1419년 식 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사예(司藝 정4품. 지금으로 말하면 국립국악원 원장)를 끝으로 낙향.

후학 양성에 나선다.

1431년 밀양 박 씨와의 사이에서 김종직 태어나고, 장인 박홍신은 좌군병마사로 대마도 정벌하다 전사하시고 부인은 무남독녀로 선산에서 밀양 처갓집으로 이사해서 처갓집 재산으로 후학들 기른다.

이사를 안하셨다면 밀양이 아니라 구미가 사림의 본산이 되었을것이다.

부친은 점필재를 직접 가르친다.


김종직 金宗直 (1431 ~ 1492)

자는 효관(孝盥)·

호는 점필재 佔畢齋.

책을 엿보는 집이란 뜻.

1453년 진사시 합격. 성균관 입학하고

1456년 증광시(세조 즉 위를 축하하는 임시과거) 합격한다. 같은해 부친 별세해서 낙향 3년 시묘한다.

1459년 식년문과 합격한다. 부친에 이어 정시과거 연이어 합격하여 성종의 총애받는다.

1471년 모친 봉양을 이유로 함양군수로 내려간다.

후학 양성에 나서게 되어 제자.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남효온을 키운다.

제자들 식년문과 모두 합격하게 되고.

1489년 형조판서(지금의 검찰총장) 등극하므로 영원한 훈구파와 사림의 전쟁이 시작 된다.

고향 김천에 경렴당(景濂:중국의 위대한 학자 주돈이의 호가 염계. 주돈이를 기리는 집 堂) 짓고 후학 양성하다가 1492년 외가댁인 밀양에서 별세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1498년 35살의 제자 김일손이 끓는 피를 주체못하고 사고 친다.

점필재가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 弔義帝文 : 의로운 임금인 단종을 기리는 글>을 <성종실록>에 올린다.

항우가 초 나라의 회왕을 죽인 중국의 고사에 비유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내용.


정축년(丁丑年:세조 3년) 10월 밀양(密陽)에서 경산(京山:성주)으로 가다 답계역(踏溪驛)에서 잤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彬江:중국 남방의 강)에 잠겼다’고 말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면서 의제를 조상한다


김종직이 꿈을 꾼 정축년 10월은 단종이 세조에게 살해당한 세조 3년 10월이라는 점에서 그는 단종을 죽인 인물이 수양임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의제’와 ‘항우’를 등장시켰던 것이다.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는 이처럼 성종의 조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해 극도의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었으나 성종 때에는 별다른 해를 입지 않았다.

성종은 비록 훈구파 한명회의 낙점으로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훈구파의 정치행태에 불만을 갖고 있었고,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로 사림파를 등용했던 것이기에 성종은 훈구파의 처벌 요구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사림파를 보호했다.

그러나 연산군에게는 이런 정치적 식견이 부족했던거다.

훈구파의 거목 이극돈이 연산군에게 발고한다.

김일손 이하 수십 명의 영남 사림들 사형.

무오사화(戊午士禍). 정여창 이하 수십 명의 영남 사림들 귀양.

갑자사화. 김종직 부관참시. 묘를 파헤치고 다시 목을 매단다.

중종 때의 기묘사화. 명종 때의 을사사화(윤 임 등이 화를 당함)로 사림의 전멸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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