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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Feb 11. 2016

건축가의 주유천하 IV 서울 압구정

하나. 압구정_사라진 흔적 속 한명회

압구정 그리고 한명회.

압구정은 강남구 압구정동 산 310에 있던 정자다.

남쪽에서 우면산 자락이 밀고 올라와 북쪽의 남산 자락인 鷹峯응봉과 마주보며 한강의 물목을 좁혀 놓은 곳의 끝부분에 세워져 있던 정자다.

원래 이곳 응봉 아래를 휘감아 도는 한강 기슭은 두무개 혹은 東湖동호라 하여 경치 좋기로소문난 곳이었다.

그래서 중종 때부터는 讀書堂독서당(젊고 재주 있는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던 집)을 이곳에 두기도 하였다.

이런 두무개 맞은편 강변의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정자를 세웠으니 이곳에 올라앉으면 서울 강산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이에 首陽大君수양대군의 모사가 되어 왕위를 찬탈하게 했던 權臣권신 韓明澮한명회가 일찍이 이곳을 차지하고 狎鷗亭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정계에서 은퇴하여 이곳으로 물러 나와 갈매기와 더불어 여생을 한가롭게 보내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에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의 賜死사사주모자로 剖棺斬屍부관참시(관을 쪼개고 시체의 목을 베는 형벌)의 극형을 받는다.

재산도 몰수되어 국고로 환수되었으니 압구정도 주인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이 압구정은 여러 손을 거쳐 조선 말기에는 철종의 부마인 錦陵尉금릉위 朴泳孝박영효 소유가 되었는데 박영효가 갑신정변(1884)의 주모자로 역적이 되자 몰수되어 정자는 파괴되고 터만 남는다.

일제강점기 이후 이곳은 경기 광주군 彦州面언주면 압구정리라 했으나 1963년 1월1일에 서울시로 편입되어 압구정동이 된다.

1970년대에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일대가 아파트 숲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압구정 자리는 동호대교 옆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에 해당한다.


韓明澮 한명회.

한상질의 손자.

본관 청주.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315명.

6명의 왕비를 배출한 명문가.

일곱 달 만에 나온 칠삭둥이.

시호 충성.

조실부모.

연속 과거 낙방.


1452년 개국공신인 한상질 덕에 음보로 개성의 경덕 궁 문지기로 벼슬길에 나선다.

12살 단종 즉위하자 이제 김종서 와 안평대군 세상이 된다.  

2년 전 장원급제한 1년 후배 권람을 찾았다.

청학동 권람의 집을 수양대군이 찾았다.

한명회와 대작.

서로의 생각이 같은 부분이 많음을 알고 수양은 한명회를 장자방(한나라를 개국한 유방의 책사 장량의 자)으로 삼는다.

홍달손을 비롯한 칼잡이들 속속 수양대군에 충성 맹세하고 김 종서 예의 주시하고 있다.

1452년 한명회가 수양대군을 찾았다.

삼촌이 조카의 왕 등극을 인정해 준 거에 대한 보답으로 먼 길을 떠난다

삼촌이 조카의 왕 등극을 인정해 준 거에 대한 보답으로 먼 길을 떠난다는 명목으로 사은사로 명나라행을 종용한다.

이유는 김종서의 의심을 와해시키는 목적으로 김종서 의심의 눈길을 풀고 안정한다.  

1453년 계유정란.

10월 10일 홍달손이 이끄는 쿠데타군 지금의 중구 충정로 농업박물관 자리에 있던 김종서 자택 습격하여 김종서의 머리를 철퇴로 쳤다.

아들 2명도 살해하며 멸족.

황보인을 비롯한 수많 은 신료들 무차별 살해.

수양대군은 직접 영의정 등극하며 경복궁 피바다가된다.

한명회는 문지기에서 軍器綠事군기녹사(군대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직책)로 고속 승진하며 다음해 동부승지, 지금 의 대통령 수석비서관이 된다.

1455년 세조 즉위하자 좌부승지, 지금의 대통령 국방수석 비서관이되자 선비들이 나선다.

1456년 역쿠데타로 다 죽인다. 그래서 사육신은 신화가 되고 한명회는 도승지,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

1457년 수양대군의 20살의 장남 의경세자 죽고 둘째 아들 해양대군 세자 등극한다.

해양세자의 부인은 한명회의 셋째 딸.

1460년 세자빈 등극하자 이제 한명회는 상당부원군, 세자의 장인이 된다.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 있던 한명회의 집은 온갖 금은보화로 넘쳐 나고 뇌물이 밀려들어도 신료들은 조용하다.

1461년 한명회 딸 장순왕후 17세의 나이로 인성대군 낳고 요절한다.

1466년 한명회 이제 영의정 등극한다.

문지기에서 최고 수장 자리에 오르는데 걸린 기간은 달랑 15년.

조선 역사상 가장 빠른 기록이다.

병으로 사직.

1468년 세조도 붕어하고 조선 제8대 왕 예종 등극하지만 13개월 만에 붕어하자

차기 왕서열 1순위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 4살,  

2순위 예종의 형 의경세자(덕종 추증)의 장남 월산대군 16 살,

 3순위 의경세자의 서자 자을산군 13살.

덕종의 마누라 인수대비와 한명회가 마주앉아 나눈다.

한명회의 넷째사위 자을산군 조선 제9대 왕 성종 등극한다.

월산대군 지금의 마포구 망월동에 망월정 짓고 노래 부른다 .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1469년 한명회 영의정 복직한다.

1474년 이제 19살의 한명회 넷째딸 공혜왕후 소천하고 네 번의 1등 공신으로 받은 땅만 2백만 평이다.  


명나라 한림학사 예겸이 한강변 한명회의 정자를 찾아 현판을 썼다.


압구정狎鷗亭.

속된 세상일에서 벗어나 한적한 강가에 머물며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리.


홍문관 부제학 최경지가 한명회에게.


胸中政使機心斷 흉중정사기심단

宦海前頭可狎鷗 관해전두가압구

가슴속의 기심을 끊을 수 있다면, 벼슬의 바다 앞에서도 갈매기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

(機心기심: 기회를 틈타 남을 속여 자기에게 이롭도록 일을 꾸미려는 마음.)


이제 명을 다하는 한명회 앞에 도승지가 병문안 왔다.

유언은 이렇다.


전하, 사람들은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나중에는 모두 게을러집니다. 이것은 인지상정이옵니다. 모름지기 끝까지 부지런하기를 처음과 같게 하신다면 반드시 대업을 이룰 것이옵니다.


1488년 묘 옆에 한명회선생신도비 건립.

충남문화재자료 제332호.

갑자사화.

폐비윤씨 사형 주 범으로 한명회가 찍혔다.

부관참시.

포졸들이 천안시 동남구 수신 면 속창리 한명회 묘를 찾았다.

썩은 관을 열더니 반듯이 누 워있는 한명회의 해골과 가슴뼈 사이를 시퍼런 칼로 힘껏 그었다.

수백 년 동안 방치.

압구정동 465번지에 있던 압구정 일제강점기 때 왜놈들이 철거.


1995년 사당 건립하고 현판을 걸었다.


충모사忠慕祠.

廢君破天七朔童 폐군파천칠삭동

鴨鷗四友得富貴 압구사우득부귀

未踏百年汚名千 미답백년오명천

上黨韓問大閥輝 상당한문대벌휘

임금을 폐하고 하늘을 깨버린 칠삭둥이 한명회. 갈매기 벗 삼고 친구가 넷 있으니 가히 부와 귀를 얻었는가. 백년도 못 사시면서 더럽힌 이름 천년을 가네 상당부원군 (청주) 한씨 빛나는 가문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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