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광복에서 분단까지 06 폭정과 여순사건
폭력으로 얼룩진 근현대사
1948년 5.10 단독선거를 통해 남한 정부의 기본을 마련하고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은 되었으나 제주도의 상황은 이승만 정부에게 점점 불리해져가고 급기야 10월 들어서면서 제주도 유격대는 공세를 더욱 강화하여 도처에서 토벌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10월 중순 대한민국의 군통수권을 쥐고있던 전 미군정장관 딘 소장 William Frishe Dean은 제14연대 1대대에게 제주 진압을 위해 출동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동포에 대한 학살명령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던 14연대 장병들은 봉기하게된다.
10월 19일 오후 8시, 김지회 중위와 지창수 상사의 지휘로 40여명의 장병들이 병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는 것을 신호로 14 연대 3,000여명의 장병들은 봉기를 거부하는 20여명의 장교와 하사관을 처단하고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여수 시내로 진입하였다.
14연대 봉기군이 여수시내에 진입하자 여수 시민들과 학생들은 봉기군을 환영하고 봉기군과 함께 경찰서, 관공서 등 기타 기관을 점령함과 동시에 그동안 민중을 수탈하고 핍박하였던 악질적인 경찰들과 우익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처단하였다.
다음날인 20일 오전9시경에는 여수시 전체가 봉기군에 의하여 완전히 장악되었고, 과거 해체되었던 인민위원회가 다시 재건되어 여수는 인민위원회에 의하여 통치되기 시작하였다.
제주도 출동 거부 병사위원회의 성명서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
우리는 조선 인민의 자식이며 노동자 농민의 자식이다. 우리는 조국의 방위와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걸고 싸우고 있다.
우리는 제주도의 애국인민을 무차별하게 학살하기 위해 우리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려는 명령에 대해, 조선 인민의 자식으로서의 사명 하에 이것을 거부하고 동포를 위해 결연히 일어섰다.
이어서 20일 오후3시에는 여수시민 4만여명이 모여 인민대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6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 인민위원회의 여수 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3. 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4.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5. 친일파, 민족반역자, 악질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6. 무상몰수 .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20일 오전 여수를 완전히 장악한 봉기군은 1개 대대 1,000여명만 여수에 남기고 2개 대대 2,000 여 명은 바로 순천으로 향했다.
오후 3시 순천 마저 완전히 장악한 봉기군은 부대를 3개 부대로 재편성하여 광양과 하동, 구례, 남원, 곡성 그리고 벌교, 보성까지 완전장악하여 각 지역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통치하는 해방구로 만들었다.
14연대 애국장병들의 여순봉기에 놀란 이승만정권은 10월 21일 봉기군 토벌 총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고 각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총 10개 대대 병력을 동원하여 광주에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트 준장의 직접 전투 지휘하에 봉기군에 대한 진압작전을 개시하였다.
대규모의 진압군이 순천으로 밀려오자 봉기군은 전세가 불리함을 판단하고 장기적인 유격전을 목표로 소규모 단위로 산개한 가운데 광양, 백운산, 보성 방면으로 미리 후퇴하였다.
23일 오후 진압군이 순천 시내에 진입하였을 때는 일부 시민과 학생들의 저항이 있었을 뿐, 봉기군은 이미 안전하게 후퇴한 뒤였다.
순천을 점령한 진압군은 봉기군에 협조한 시민과 학생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한 뒤 24일 여수만 일대의 해안을 봉쇄하고 여수,광양 지역을 완전 포위한 뒤 장갑차를 앞세우고 진압작전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여수부근 미평에서 봉기군의 매복작전에 걸려 진압군 270여명이 사살되고 총사령관 송호성까지 봉기군의 총격에 부상을 당하는 등 봉기군의 기습에 진압군은 전의를 잃고 후퇴하고 말았다.
그러자 광양과 여수시내에 있던 봉기군은 야음을 틈타 진압군의 포위망을 뚫고 벌교와 지리산 방면으로 재빨리 후퇴하는데 성공하였다.
25일 봉기군이 빠져나간 여수에 진입한 진압군은 마지막 까지 여수에 남아 항거하던 노동자, 청년, 학생 등을 진압하고 순천에서와 같은 보복적인 테러와 방화, 약탈, 그리고 무자비한 학살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진압군에 의하여 학살된 민중의 수는 이승만정권의 축소된 발표에 따르더라도 자그만치 6,000여명에 이르렀다.
23,000여명의 민중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5,000여호의 가옥이 진압군과 경찰 등 테러단의 보복 방화에 소실되었다.
진압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봉기군들은 유격대로 전환함으로써 2.7 구국투쟁 이후 야산대의 형태로 활약하던 무력항쟁대와 결합하여 본격적인 유격 항쟁을 시작하였다.
14연대 봉기군들과 야산대의 결합으로 강화된 유격대들은 전남 야산지대와 전북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호남유격전구」,
지리산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유격전구를 구축하였던 남한 유격대의 총본산이라 할 최대 유격전구인 「지리산 유격전구」,
강릉, 삼척을 중심으로 한 「태백산 유격전구」,
경남과 경북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영남 유격전구」,
그리고 「제주도 유격전구」등이 남한의 거의 전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500여명의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완전 철수하였다.
미군이 철수하자 민족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 제거되었다고 판단한 남북의 정당 사회단체 71개 대표 676명이 6월 25일 평양에서 회합을 하고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한의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이 상호 통합하여 새로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하 조국전선)을 결성하였다.
조국전선은 6월 27일 12개항의 평화적 조국통일 계획을 발표하고 남북한 정부에 대하여 통일정부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조국전선의 통일정부 구성 제안을 즉각 거부하였고, 이에 남한 각처의 유격대들은 이승만정권에 대한 무력투쟁을 재개하여 본격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여 조직을 확대하고 정비하여 「인민유격대」로 재편하고 적으로부터 탈취한 박격포, 로켓포 등 중무기로 무력을 증강시켜 경찰본서와 대도시를 직접 공격하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1949년 한해동안 이승만정부의 압제에 항거하는 118,621명의 애국인사가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1949 년 11 월 부터는 미국의 군사원조 하에 본격적인 유격대 토벌작전을 벌여 곳곳에서 보이는 것은 다 불태워 없애버리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며 유격대의 거점에 대한 무자비한 포위공격을 감행하였다.
대규모 토벌작전에 봉착한 유격대들은 최소한의 피해를 감수하며 후퇴하여 민중들 사이에 파고들어 세력보존을 위한 '월동투쟁'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듬해 봄인 1950년 3월 부터는 다시 진용을 정비하여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세력은 30석에 불과 하였으나 대미 자주노선과 평화적 민족통일을 주장하는 과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던 조소앙 등 진보적 인사들은 무려 130여명이나 대거 당선되었다.
남한 민중들이 이승만 정권에 대한 거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승만정권은 민중으로 부터 극도로 고립되고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에 대한 각계 각층 민중의 이반은 매우 심각하였고 무장유격투쟁 또한 나날아 격화되고 있었으며, 미군 마저 철수 해버린 상황에서 이승만정권이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군대 또한 숙군사업을 통하여 군대내 저항 세력들을 대규모 숙청하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로 동요하고 있어 완전히 믿고 의지할 수도 없어 정권의 붕괴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은 미국의 대규모 군사 개입이 단행됨으로써 붕괴 직전의 이승만 정권을 위기에서 구출하여 주었다.
다음은 한국전쟁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