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맡은이가 직필 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음.
남부지방이 장맛비에 잠겨 있는 동안 중부는 잠간의 빛이 들어났다.
새벽, 다시 북상한 장마전선은 이제 경기 일원에 빗줄기를 뿌릴걸 준비한다.
어제 저녁은 오랜만에 TV 뉴스전체를 봤다.
보면서 전체적인 기사의 편중에 관한걸 느끼게 한다.
늘 굵직한 사건 사고에는 미디어가 한 몫을 했다.
밥줄때문에 너희도 그 상황에 처하면 어쩔수 없다는,
힘에 못이겨 브리핑 자료의 사실여부를 확인조차 하지 않고 경쟁적으로 기사를 실어 보낸다는,
窮塞궁색한 변명을 늘어 놓는다.
객관성이라던지 가치중립성은 물론 중요한 요소지만 ,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약자에 대한 공감이다.
우리가 흔히 '정의감'이 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약자에 대한 공감'에서 출발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보다 더 센 사람들, 강자들의 입장에 대해 공감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굴종이나 부패의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펜을쓰는 사람들은 그 책임을 생각해야한다.
晉진의 실력자 趙盾조돈이 晉襄公진양공 서거 후 어지러운 후계자 중에 어린 세자(당시 일곱 살) 夷皐이고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으니 그가 晉靈公진영공이 였다.
진영공은 장성하자 음탕하고 포학해 졌다.
이에 조돈이 계속 忠諫충간을 하니 영공은 조돈을 죽으려 했으나 가신인 提彌明제미영이 죽음으로 막아 겨우 살아나 국경 근처에 피신했다.
이때 대신이며 집안인 趙穿조천이 무도한 영공을 桃園도원(영공이 만든 화원)에서 시해했다.
조돈은 이 소식을 듣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史官사관인 董狐동호가 공식 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가을 7월 을축일에 조돈이 桃園도원에서 그 임금 夷皐이고를 죽였다.」
조돈이 이 기록을 보고 항의하자 동호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대감이 분명히 하수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감은 승상의 몸으로서 달아났다고 하지만 국경을 넘지 않았고, 또 도읍으로 돌아와서도 범인을 찾아내어 처벌하거나 처벌하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승상이 그 일을 꾸민 것이 아니라고 극구 변명할지라도 누가 곧이듣겠소?」
조돈은 탄식한다.
「슬프다! 사관의 권력이 정승보다 더하구나. 내 그때에 국경을 넘어가지 않았다가 천추만세에 누명을 쓰게 됐으니 한(恨)이로다. 내 지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훗날 공자는 이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동호는 훌륭한 사관이었다.
법을 지켜 올곧게 직필했다.
趙宣子조선자(조돈)도 훌륭한 대신이었다. 법을 바로잡기 위해 오명을 감수했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국경을 넘어 외국에 있었더라면 책임은 면했을 텐데…….
후세 사관들은 그의 正論直筆정론직필을 찬양하였다.
庸史紀事 良史誅意 용사기사 양사주의
穿弑其君 盾蒙其罪 천시기군 돈몽기죄
寧斷吾頭 敢以筆媚 영단오두 감이필미
卓哉董狐 是非可畏 탁재동호 시비가외
보통 사관은 사실을 기록하고 훌륭한 사관은 붓으로 부정을 죽이는 도다.
조천이 그 임금을 죽였지만 조돈은 그 죄를 벗지 못했도다.
비록 그대가 내 머리를 끊을 순 있지만 내 어찌 붓대로써 그대에게 아첨하리오했으니
참으로 장하도다, 동호여
세상에 두려운 것은 시비, 흑백인가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