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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Aug 05. 2017

건축가의 주유천하 III 경상 안압지

스물일곱. 경주 이야기 09. 천년왕국 신라에서 조선까지, 안압지

雁鴨池안압지.

안압지는 臨海殿임해전에 딸린 연못이다.

그래, 정식 명칭은 臨海殿址임해전지.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 등에 기록됐는데,

신라가 망하고도 천년이 흐른 조선시대, 폐허가 된 이곳 월지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조선의 묵객들이 폐허로 남겨진 임해전지를 그때부터 이곳은 雁鴨池안압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천년고도 경주의 영화는 사라진지 오래고 오리와 기러기떼 만이 폐허가된 궁궐池에 날아드니

月池에 비친 달은 더이상 천년 전의 운치있는 달이 아니다.


또 다른 이름은 月池월지.


이 별궁엔 환한 불이 밝혀졌고 많은 궁중 사람들이 달을 바라보며 이 연못을 거닐기도 하고 혹은 연못에 뜬 달을 따려 배를 띄우기도 했을것이다.

안압지라는 이름보다는 훨씬 더 운치있고 연못 자체의 모습과도 더욱 잘 어울리는 듯하다.


안압지는 경주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40년 전 연못을 준설하는 과정에서 기와 등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듬해 본격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2년 2개월 동안 나무배, 금동여래입상, 14면체 주사위(주령구) 등 3만3000여 점이 출토됐다.

14면체 주사위가 출토돼 건조기에 넣고 말리다가 유물을 태운 일, 남근 모양의 목간이 출토되자 서로 만져보겠다고 달려든 얘기 등이 차례차례 공개됐다.

40년 전 경주 안압지 발굴조사 모습-조선닷컴

발굴 결과 임해전은 궁궐터였음이 확실히 밝혀졌고, 남북 일직선상에 중문, 정전, 내전이 배치되었고, 중문에서 내전 후면까지 회랑으로 둘러져 있으며, 안압지 서쪽 못가 에 5개의 누각 건물터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안압지가 발굴되면서 조선시대 묵객들의 시상의 대상이 되곤 하였던 이곳이 전성기 신라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인 보고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발굴 유물들은 막 통일의 꿈을 이룬 신라의 모습 전체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석하게도 당시 길이 6.2m에 이르는 통일신라 나무배를 옮기는 도중에 배가 두 동강이 났다.

최병현 교수가 "1500년 넘게 뻘 속에 묻혀 있었으니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속은 스펀지 상태"라고 하자, 김동현 단장이 "수십명 인부가 달려들어 옮기는데 몇 사람이 힘을 안 썼는지 나무가 휘어서 가운데가 토막이 났다. 제가 그날 사표를 써서 문화재관리국장한테 보냈다"고 했다.

1975년 안압지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나무배(목선)를 인부 수십명이 옮기고 있다-조선닷컴

안압지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삼국사기>등 여러 문헌들은 東宮동궁(태자가 기거한 곳)의 용도로 사용하기 위하여 674년부터 만들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孝昭王효소왕 6년(697) 9월, 왕이 월궁의 가장 중요한 전각인 臨海殿임해전으로 군신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 임해전의 동궁에 붙은 것이 안압지였다.


임해전지는 통일신라시대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기념하여 임해전과 안압지를 조성한 것이다.

신라의 왕들은 이 곳 임해전에 군신을 모아 큰 잔치를 배푼 정사를 돌보는 궁이 아닌 연을 배설하거나 나라의 손님들을 모시는 궁인것이다.

사적 제18호.

임해전 내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기르고 珍禽異獸진금이수(진귀하고 기이한 새와 짐승)를 양육하였다 하니, 이 연못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동물원까지 겸비한 신라시대 최고의 정원이었던 것이다.

연못 기슭과 크고 작은 세개의 섬에 실시된 護岸工事호안공사의 정교함이나 導水路도수로와 배수로의 절묘한 시설은 뛰어난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술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곳의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금동여래삼존상과 금동 부살상, 통일신라시대 당시의 목조배, 건축부재, 목간, 주사위 등은 신라시대를 연구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유물들이다.


천년고도 경주의 야경은 남다른 매력이 있다.

특히 안압지의 야경을 놓친다면 경주여행의 한 축을 잃는 것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압권이다.

복원을 마친 안압지의 야경의 조명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축대를 바라보면 천년 전 통일신라의 그 영화가 충분히 상상되고도 남음이 있다.

고구려처럼 큰 나라는 아니었지만 신라는 엄연히 삼국을 통일했으며 전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천년을 이어온 로마와 함께 두나라 중 한 곳이며 제국이 아닌 단일국으로는 유일한 나라, 신라.


요즘들어 고구려 역사를 놓고 벌이는 중국과의 신경전이 벌어지고 약속이나 한 듯 쏟아져 나오는 고구려와 발해에 관한 사극과 관련 서적들 때문에 신라의 역사는 어쩐지 소외받고 있다는 그리고 저평가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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