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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Oct 17. 2017

건축가의 주유천하 III 경상 포석정

스물여덟. 경주 이야기 10. 천년왕국 신라에서 조선까지, 포석정

경애왕 4년(927) 11월, 견훤이 경주에 쳐들어왔다.


왕은 왕비 궁녀와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느라 적이 오는 줄도 몰랐다.

경애왕은 호위병도 없이 병풍을 손수 가리고 광대들에게 군사를 막게 한 후 이궁으로 달아났지만 곧바로 견훤에게 사로잡혀 왕비와 부하들 앞에서 자결. 이후 효종 이찬의 아들 傅부가 왕위에 올라 신라 최후의 경순왕이 되지만 그도 왕위에 오른 지 몇 년 안 되어 견훤에게 항복함으로써 신라는 패망했다.

- 삼국사기


이것이 우리가 초중고 역사교과서에서 배워 왔던 내용이다.

삼국사기가 기술한 내용은 어처구니가 없다.

적이 쳐들어오는데 그것도 11월에 야외에서 연회를 했다?

그때는 음력 11월이니 물이 흘러도 얼어 버릴 것이며 추운데 한데에서 논다는 것은 의문을 가질만하다.

더군다나 근래에 발견된 花郎世記화랑세기(신라 중대 김대문이 쓴 화랑들의 전기)에 포석정이 아니라 鮑祠포사 또는 鮑石祠포석사라고 되어 있다.

화랑세기를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1999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삼국시대의 砲石포석명 기와는 화랑세기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던 포석사가 실재했음을 잘 보여준다.

화랑세기 필사본
포석명 기와

이곳은 박혁거세가 태어난 신성한 장소인데, 그런곳에서 나라가 풍전등화의 시점에 망나니짓을 했다는건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서남산 일대는 신라의 시작인 박혁거세의 전설이 있는 나정을 비롯해 육부촌, 장창지, 선대의 왕릉 등이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성스러운 사당이 포석정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승리한 고려의 역사왜곡이란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는 견훤의 군대가 진격해오고 있던 때,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해 놓은 경애왕은 포석정을 찾아 제사를 지내다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아직 정확한 사료가 뒷받침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수 없다.

다만, 김부식은 철저히 패자측의 내용을 심하다 하리만큼 적고 있다는걸 감안 한다면 연회는 무리수인듯 하다.


포석정 앞에 말을 세울 때 생각에 잠겨 옛일을 돌이켜보네

유상곡수하던 터는 아직 남았건만 취한 춤 미친 노래 부르던 일은 이미 옳지 못하네

함부로 음탕하고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쏜가 강개한 심정을 어찌 견딜까

가며가며 오릉의 길 읊조리며 지나노니 금성의 돌무지가 모두 떨어져버렸네

- 徐居正서거정의 十二詠歌십이영가 중


鮑石亭 포석정


신라 시대에 流觴曲水유상곡수의 연회를 행하던 곳이라 한다.

유상곡수는 삼짇날에 술잔을 물에 띄워 두고, 왕과 귀빈을 비롯한 참석자가 물길을 따라 앉아서 술잔이 돌아오기 전에 시를 짓던 놀이다.

헌강왕 때 남산의 산신령이 포석정의 연회에 놀러왔다고 한다.

이 때 산신령과 헌강왕이 함께 춤을 추었는데, 이것이 신라 시대의 춤인 御舞어무 霜髥舞상염무(山神舞산신무)의 기원인거고.

포석정의 수로는 22m.

물이 그대로 흘러가면 2〜3분 만에 다 빠져나가므로 그 짧은 시간에 4언시나 5언시를 짓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시작(詩作)을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7〜10분 정도는 주어야 한다.

포석정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유체역학으로 말끔히 해결했다.

술잔이 曲水곡수를 돌 때 맴돌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 것이다.

수로 경사가 급격히 변하는 지점이나 굴곡이 있는 지점은 수로 폭을 확장하거나 내측 바닥면의 함몰을 조성하여 술잔의 전복을 방지한다.

사적 1호. 면적은 2200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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