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에, 어떤 이들에게는 스포츠를 빌미로 거대 자본이 더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는 부도덕한 이벤트로 기억되기도 한다. 심각한 환경파괴와, 국민 세금이 사회복지에 사용되기보다 겨우 2주 반 정도의 기간인 올림픽에 사용되어 버리거나, 서민들의 이해관계에 반해 부동산 가격이 치솟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득을 받는 이들은, 세금 혜택을 이미 누리고 있는 올림픽위원회와 매체를 포함한 다국적 기업 및 은행뿐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또한, 올림픽 기간 동안에는 시민들의 자유를 저해하는 강력한 감시체제와 규제가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밴쿠버시는 올림픽에 반대하는 문구와 싸인을 불법으로 범죄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밴쿠버 동계 올림픽 기간 동안 씨큐러티에 사용된 돈은 10억 불 (1조 원)이 넘었다고 한다. 1000여 대의 cctv가 설치되었고, 다운타운코너마다 무장한 경찰이 가득했다. 경찰이 행인들에게 시민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을 요구하는 어이없는 행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경찰은 올림픽에 반대하는 시민운동가의 집을 방문하여, 올림픽 기간 동안 거리에서 얼쩡대지 말라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헬기도 동원되었다. 군대화된 경찰을 동원한 국가의 비민주적 감시체제는 올림픽의 종료와 함께 멈추지 않는다. 민주사회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올림픽이 끝난다 할지라도 한번 시민의 영역이 침범되기 시작하면, 시민의 민주적 권리를 되찾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험에 근거한 것일까? 몇 달 뒤 토론토에서 열린 G20 회담 시, 시민들에 가해진 끔찍한 폭력은 평화로운 캐나다라는 신화를 깨기에 충분했다)
당시에 나는 밴쿠버 다운타운에 거주했었는데, 이리저리 펜스가 쳐지고 사람들이 무장한 경찰의 지휘를 따라 정해진 곳으로만 이동해야 했던 것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한다. 너무도 어수선해서, 축제가 아니라 거의 준전시 상황으로 느껴졌는데, 중요한 건 시민의 "공공영역"이 심하게 제한받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밴쿠버 올림픽이 개최된 B.C주는 원주민들과의 오래된, 해결되지 않은 조약의 문제가 있다. B.C 주가 1871년 연방에 병합되었지만 실상 B.C 주의 많은 땅이 캐나다의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원주민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캐나다가 불법적으로 땅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원주민 활동가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시민 그룹들이 밴쿠버 올림픽 개최를 반대했었는데, 그중 나이 많은 원주민 어르신들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https://www.olympic.org/vancouver-2010)
밴쿠버 올림픽에서 또 크게 논란이 일이난 이슈가 있다. 바로 저작권 보호를 받아 올림픽에서 자본 창출의 수단 중 하나가 되는 심벌마크이다. 캐나다 정부는 올림픽을 위해 북쪽의 원주민들(이누잇)이 사용하는 "이눅숙(Inukshuk)"을 기본으로 디자인한 심벌을 공식 선정하게 된다. 물론, 원주민들이 이 심벌 제작에 관여한 바는 전혀 없으며, 정부가 이누잇 원주민들에게 사전 논의나 동의를 구한 바도 없다.
곧, 이 심벌은 "문화 전유" 내지는 "문화적 도용"이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옥스퍼드 사전이 아주 간략히 정의하고 있는 문화 전유란, "창의적인 또는 예술적인 형태, 주제, 행사 등을 다른 문화(그룹)로부터 가져다 쓰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서구사회가 비서구사회(비백인)의 것들을 착취하거나 지배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문화 전유 개념은 이보다도 더 확장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잘 알려진 사례들로는 여성주의 신념을 다국적 회사가 자본축적을 위해 마케팅에 활용하거나 (도브 광고), 대학 축제에서 백인 학생들이 흑인 분장, 게이샤 분장, 원주민 분장을 하고 유치하게 노는 경우들이 있다.
이눅숙(Inukshuk)은 이누잇들의 생존에 아주 중요한 표식 역할을 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누잇들은 캐나다의 노스웨스트 테러토리(Northwest territories)와 누나붓 (Nunavut), 덴마크령인 그린란드, 미국의 알래스카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 그들은 시시각각 폭설로 바뀌는 험난한 지형에서, 생존을 위해 어떤 지역이 사냥과 어업을 하기 좋은 장소인지 표식을 위해 이눅숙을 세웠다. 혹은 이누잇들이 지난 간 자리를 알리기 위해 의사소통의 방법으로 약 1-2미터에 달하는 돌무더기를 쌓았던 것이다. 어떤 이눅숙은 위쪽에 창문처럼 빈 공간을, 혹은 아래쪽에 빈 공간을 만들어 그들끼리의 기호로 사용한 것이다.
원주민 시민활동가 Peter Irniq에 따르면, 올림픽에서 사용된 심벌은 이눅숙이 아니라 보통 이누웅악(inunnguag)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눅숙에 사람 형태처럼 머리, 팔, 다리를 붙여놓은 것을 뜻한다. 생존의 필수품이었던 이눅숙은 이누잇 원주민들에 의해 몇 천년 동안 사용되어 왔고, 캐나다에서 상품으로 팔려나가는 이누웅악은 약 100년 전부터 여기저기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 심벌을 제작한 디자이너와 캐나다의 올림픽 준비위원회는, 처음부터 이눅숙과 이누웅악의 역사적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고 "우정"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올림픽 기간 동안 캐나다인들과 세계인들에게 "우정"의 의미를 가진 이눅숙으로 급조되어 장식품이나 관광상품으로 팔려나갔다.
물론 문화는 항상 변화한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순수한 문화적 오브제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류는 역사적으로 서로 교환하고 의미를 주고받고 영향을 미치며 싫든 좋든 문화적 창작의 결과물을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몇천 년간 사용해온 이누잇들의 지혜로운 창작물인 이눅숙이, 밴쿠버 올림픽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의미의 창작물로 변형이 된 것에 대해 어떤 규제를 가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원주민의 입장에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캐나다가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땅이 존재하는 바로 그 B.C주에서, 이누잇의 전통에 대한 이해 없이 그 심벌만을 전유해 올림픽이라는 돈 잔치판을 벌였다. 그리고 그 수익은 당연히 이누잇의 복지와 상관없다. 서부 캐나다에서 개최되는데, 굳이 북부의 원주민 문화 창작물을 억지로 끌어다 만든 것도 뭔가 부자연스럽다.
상상력을 좀 더 동원해보자. 만일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병합된 상태에서 2010년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다 치자. 조선시대 열녀들이 (물론 열녀 만들기를 개인적으로 응원하진 않는다) 소장하던 은장도를 일본의 심벌로 사용하여, 몇 백 년 동안 초밥 만들기용으로 장인들이 소장하던 것이라고 의미를 바꿔버린다면? 그 은장도를 일본풍 상품에 여기저기 붙여 한국인들은 그 이득을 제대로 못 받는다면? 나아가 조센징이라 차별당하고, 사회서비스도 제대로 못 받으며, 높은 실업률에 감옥에 갇힌 한국인들이 넘쳐나는 사회라면? 젊은 한국 청소년들은 이른 나이에 자살을 해 버리고, 알코올 중독에 찌들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면?
결국 문화 전유는 권력관계가 평등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 문제의 심각성이 불거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야, 다른 문화들이 서로 만나고 충돌되고 변형이 된들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인가?
(아주 오래전 남편이 어린이였을 때, 할머니가 주신 조각품들. 당시에는 저렴한 가격으로 통용되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눅숙 뿐만 아니라, 이누잇들이 만든 예술품들은 정말 아름답다. 우리 집에도 남편의 외할머니가 남겨주신 조각품들이 몇 개 있다. 들여다볼수록 정감 가고, 마음이 포근해진다. 만일 문화 전유라는 개념이 융통성 없이 적용된다면, 아마도 나는 죄책감(?)을 가지고 이 조각품들을 대해야 할지 모른다. 아름다운 예술품에 대한 감사함과 심미감을 느끼기 위해서, 어쩌면 불공평한 권력관계와 사회구조에 대한 지각 역시 동반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P.S 사실 이 글은 샘 오취리가 지적한 한국 학생들의 가나 흑인 분장 사건에 대해 생각을 하다 쓰게 되었습니다. 한국이나 서구나 아프리카에 대해 많이 배우지 못했고, 지구적으로 흑인차별이 존재하는 구조적 문제가 있습니다. 문화전유는 그 맥락안에서 사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