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류들이 합류하던 해

2025년 회고

by 아키비스트J

사건이 아닌 생각을 복기하다

연말이 되면 한 해를 정리하는 글을 쓰곤 합니다. 무엇을 했는지,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내년엔 무엇을 할 것인지. 그런데 올해는 다른 방식으로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What이 아닌 Why와 How. 사건의 목록이 아니라, 그 사건들 뒤에 있던 생각의 흐름을 복기해보기로 했습니다.


2025년 12월 17일, 저는 사업자등록증을 손에 받았습니다. 사업개시일이라는 행정적 날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왜 한 해의 끄트머리였을까? 왜 2024년이 아니었고, 왜 2026년이 아니었을까?



충동, 준비, 계산, 갑작스러움

7월에 저는 이런 문장을 썼습니다.


'51%의 가능성만 감지하면 바로 뛰어들어 보자'


개인적으로 큰 변화가 있던 시기, 결심에 다짐을 더한 몸부림의 문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12월에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과정을 돌아보니, 단순히 '51% 가능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충동적이었다고 하기엔 준비되어 있었고, 계산적이었다고 하기엔 갑작스러웠습니다. 이 모순적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지류들이 따로 흐르다가 합류했다

2025년 한 해 동안 저는 참 여러가지 일을 했습니다. 예비창업패키지 최종 관문까지 갔다 떨어져보기도 했고, 내노라하는 투자사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에도 도전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갈피를 잡지 못하다 결국 남들 보기에 좋아보이는 사업 말고 내가 가진 why와 vision은 무엇인지를 찾아보기로 결심했죠.


'Archive AI Study'를 운영하며 아카이브 전문가와 AI의 결합 가능성을 탐색했고, '플루타르크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개인 아카이브에 방점을 둔 지식관리 시스템을 구상했습니다. 브런치에 아카이브 AI 패러다임을 연재하며 생각을 정리했고, GPTers 스터디에서 비즈니스 로드맵을 배웠습니다.


이것들은 각각 다른 목적으로 시작한 것들이었습니다. Archive AI Study는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기 위한 것이었고, 플루타르크는 제 PKM을 발전시키려는 시도였습니다. 브런치 연재는 흩어진 생각들을 정리하는 과정이었고, GPTers 스터디는 새로운 프레임워크를 배우는 자리였습니다.


딱히 하나의 목적으로 준비한 일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말 빠른 속도로 이 지류들이 한 개의 큰 물줄기로 합류하는 게 보였습니다. 따로 흘러가던 것들이 연결되면서 하나의 그림이 됐고, 그 그림은 순식간에 빠른 의사결정으로 이어졌습니다.



버텀업과 탑다운의 균형

이 경험을 통해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탐색과 목표설정은 따로가 아니라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것.


11월에 진행했던 비즈니스 로드맵 스터디에서 아마존(Amazon) 사의 '순서파괴 이론'을 접했습니다. 미래의 목표가 과거를 재정의한다는 방법론, Working Backwards 방식처럼 결과에서 역산하는 접근법입니다. 이것은 탑다운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해 온 방법은 그 반대였습니다. 목표 없이 탐색하고, 탐색하다 보니 그림이 보이고, 그림이 보이니까 로드맵이 됐습니다. 이것은 버텀업 접근법입니다.


어느 하나가 우세하지도 않고, 둘 중 하나만 택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각자 장단이 있습니다. 탑다운만 하면 경직되고, 버텀업만 하면 갈 길을 잃습니다. 다행히 2025년 말 저는 이 둘의 균형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의식적으로 설계한 것이 아니라, 돌아보니 그렇게 됐던, 꿈보다 해몽 격이지만 말입니다.



합류의 순간은 어떻게 오는가

지류들이 합류하는 순간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 순간이 오기 위한 조건은 있었습니다. 첫째, 외부 자극이 필요했습니다. 스터디, 대화, 피드백. 혼자 생각만 해서는 연결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터디에서 비즈니스 로드맵을 배우면서 그동안 쌓아둔 지식-워크스페이스, 에이전틱 AI, 오케스트레이션, 아카이브 활용에서의 고민과 같은 것들이 연결됐습니다.


둘째, 대화하고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생각을 글로 쓰고, 누군가와 이야기하면서 흐릿하던 것이 선명해졌습니다. AI 에이전트와 대화하는 것도 이 과정에 포함됩니다.


셋째, 지식 간의 연결이 필요했습니다. 이 과정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냥 정보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열되어 있는 지식이 연결되어 3차원적 인과관계를 가질 때 그 가치가 빛을 발하니까요. 옵시디언에서 제텔카스텐 방식으로 노트를 연결하고, 그것을 다시 훑어보며 재발견하는 과정이 제 AI 워크스페이스에서 매일 발생했습니다.



관찰자에서 당사자로

아카이브 AI 패러다임을 시작할 때, 스스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카이브는 정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것은 관찰자로서의 질문이었습니다. 12월 '아키비스트의 창업일기'를 시작하면서, 저의 관점이 전환되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2025년 말은 관찰자에서 당사자로 넘어간 시기였습니다. 입력하는 사람에서 설계하는 사람으로, 도구의 사용자에서 시스템의 설계자로, 다른 이의 기록을 대신 관리하는 컨설턴트에서 자신의 기록을 직접 남기는 주체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2026년을 위한 설계

2025년의 균형은 우연히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026년에는 이것을 의식적으로 설계하려 합니다. 탑다운으로는 만다라트 기반의 KPI 측정과 평가기준을 만들었습니다. (이 만다라트를 만드는 데에도 역시 좋아하는 AI master 이미커피의 이림님(인스타그램, 브런치)이 만든 AI 만다라트 메이커로 생성했습니다.쉽게 만들 수 있으니 한 번 해보세요.) 저의 만다라트는 사업 성장을 중심에 두고, 8개 영역을 폭발적 성장을 목표로 확장하고, 분기별로 측정하는 구조입니다.


버텀업으로는 아이디어 노트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status: seed 상태로 언제 합류할지 모르는 지류들. 이것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입니다.


각각의 지류들이 하나로 합류하도록 만드는 트리거는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로 택했습니다. 정기적인 리뷰 일정을 잡기에는 제가 너무 바쁠 것 같아서요. 어차피 계속 있을 스터디나 강의, 협업과 대화에서 오는 자극을 아이디어들과 연결할 때, 미리 AI 에이전트의 커맨드 규칙에 심어두고 알아차리려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더 많은 도구나 자동화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꾸준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대화하고, 정리하고, 연결하고, 재발견하는 루프를 유지하는 것.


누적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2025년의 지류들이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꾸준히 쌓아왔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고, 스터디를 하고, 노트를 연결하고, 대화를 나눈 것들이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합류의 순간이 올 수 있었습니다. 2026년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바빠지면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는 것들, 당장 급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 그것들을 지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루틴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시스템을 잘 만들어두어야겠습니다.


별 생각 없이 그냥 하면 되려나요. 숨쉬듯이 밥먹듯이 매일 같이요. 그런 거라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인류를 위해'라는 말의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