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위해'라는 말의 함정

by 아키비스트J


2022년 11월, 미국 당국이 Z-Library를 압수하고 운영자 2명을 체포했습니다. 1천만 권 이상의 책과 논문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었습니다. 며칠 후, 'Anna'라는 익명의 인물이 Anna's Archive를 런칭했습니다. 현재 6,134만 권의 책과 9,553만 편의 논문을 인덱싱하는 세계 최대의 섀도우 라이브러리입니다.


Anna는 자신의 활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인류 지식의 궁극적 통합 목록', '인류의 음악적 유산을 보존', '디지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거대한 서사입니다. 누가 이런 대의명분에 반대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인류를 위해'라고 말하는 순간, 암묵적으로 누군가는 '인류' 바깥으로 밀려납니다.






아카이브를 구성하는 것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자크 데리다는 『아카이브 열병』에서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아카이브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식별하고, 해석하는 권력'을 그는 '아르콘적 권력'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엇이 기록되고 무엇이 삭제되는가는 권력 관계를 반영합니다.


Anna가 '인류의 지식'을 아카이빙한다고 선언할 때, 그것은 곧 권력 행사입니다. 누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투표도 없었고, 토론도 없었습니다. '나는 인류를 위해 한다'는 선언은 반박 불가능한 도덕적 고지를 선점합니다. 반대하면 '넌 인류의 적이냐?'가 되어버리니까요.


저작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작가, 음악가, 소규모 출판사, 독립 연구자. 이들은 Anna가 정의한 '인류'에 포함되어 있을까요? Anna의 레토릭 안에서 이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식 민주화'의 그늘에 가려진 사람들입니다.





바꿔야지, 부수면 안 된다


학술 출판 시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대형 학술지들이 과점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DBpia 의 학술 논문 유료서비스 논쟁이 뜨거웠었죠. 연구자가 공적 자금으로 생산한 연구를 무료로 받아, 다른 연구자가 무료로 피어리뷰하게 하고, 이를 다시 도서관에 비싼 값에 판다는 건 분명히 개선이 필요한 구조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와 '그래서 내가 뭘 해도 된다'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시스템에 문제가 있으면 바꿔야 합니다. 출판사와 연구자 간 인세 구조를 신설하고, 구독료를 적정화하고, Open Access 전환을 가속화하는 것. 이것이 '고치는 것'입니다. Anna가 하는 것은 '어차피 다 부러져 있으니까 내가 그냥 열어버릴게'입니다. 고치는 척하면서 부수는 것이죠.


'무료'가 '공짜'가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농부가 농사지어서 돈을 못 벌면 농사를 안 짓습니다. 연구자가 연구해서 돈을 못 벌면 연구를 안 합니다. Anna는 창고에 있는 곡식을 나눠주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다음 해 씨앗을 없애고 있는 건 아닐까요?






진짜 수혜자는 누가 될 것인가


여기서 불편한 가능성이 드러납니다.


Anna가 무료로 푼 1.1페타바이트의 데이터로 누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개인 연구자는 논문 몇 개를 다운받아 읽을 수 있습니다. 인도의 대학생은 교과서 PDF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OpenAI, Google, Meta는요? 전체를 LLM에 학습시킬 수 있습니다.


OpenAI는 저작권 있는 책으로 GPT를 학습시켰다는 소송에 휘말려 있습니다. Meta는 LibGen 데이터로 LLaMA를 학습시켰다는 내부 문서가 유출되었습니다. Anna's Archive는 이들에게 '우리가 불법 수집 안 해도 돼, 이미 누가 풀어놨네'라는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우회로를 제공합니다.


'인류를 위해'라고 말했지만, 실제 수혜자는 수조 달러 빅테크 기업들입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짓는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실리콘밸리 데이터센터를 채워줄 수도 있었던 겁니다.





자기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모른다는 것

또는 모르는 척 한다는 것


'Anna'가 진정으로 오만한 이유는 '인류를 위해'라고 말해서가 아닙니다. 자기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도 모르면서 '인류를 위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의도와 결과 사이의 괴리를 인식하지 못한 채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 이것이 진짜 오만입니다.


데리다의 말을 다시 떠올립니다. 아카이브를 구성하는 것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 권력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누가 진짜 수혜자인지. 우리는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류를 위해'라는 말이 나올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인류'에 나는 포함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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