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네 가지 삶

by 아키비스트J


2024년 12월, 힐튼서울 지하 창고. 전시팀이 오래된 캐비넷을 열자 4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청사진과 서신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종이는 누렇게 바랬지만 김종성 건축가가 그린 설계도는 여전히 선명했습니다.


전시 기획자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자료들은 40년 동안 여기 있었어요.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았죠.


그 순간 저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40년 동안 캐비넷 안에 있었던 이 기록은 정말 '존재'했던 걸까요?


# 있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

기록은 네 가지 방식으로 삽니다.


가장 수동적이면서도 가장 확실한 형태가 물리적 보존(Physical Preservation)입니다. 지하 창고든 클라우드 서버든 그냥 '거기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종이는 종이고 파일은 파일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물질로서의 존재입니다.


여기서 한 단계 올라가면 접근 가능성(Accessibility)의 영역에 들어섭니다. 창고 문이 열려 있고 목록이 정리되어 있으며 검색할 수 있다면 기록은 '발견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힐튼서울 전시팀이 지하로 내려가 캐비넷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아무도 그 의미를 모릅니다. 잠재적 존재의 단계입니다.


의미론적 활성화(Semantic Activation)는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누군가 청사진을 펼쳐보고 '이게 김종성이 토탈 디자이너로서 승강기 버튼 하나까지 직접 디자인한 흔적이구나'라고 이해하는 순간, 기록은 비로소 의미를 얻습니다. 정보가 지식으로 변환되는 순간입니다. 큐레이터의 눈이 그 의미를 읽어냈을 때 40년 된 청사진은 처음으로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은 사회적 기억(Social Memory)으로의 확장입니다. 전시가 열리고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공유할 때 기록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1980년대 한국의 국제화를 상징하는 문화적 유산으로서 집단적 기억의 일부로 살아 숨 쉬게 됩니다. 개인의 해석을 넘어 사회적 담론으로 확장되는 단계입니다.



# 관심이 만드는 존재의 위계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은 '정보가 소비하는 것은 관심'이라고 했습니다. 기록이 층위를 상승하려면 누군가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물리적 보존에서 접근 가능성으로 올라가려면 목록화와 메타데이터 생성이 필요하고, 접근 가능성에서 의미론적 활성화로 올라가려면 누군가 읽고 해석해야 하며, 의미론적 활성화에서 사회적 기억으로 올라가려면 전시와 출판과 교육을 통한 공론화가 필요합니다. 각 단계마다 관심의 투입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그 관심을 투입할 권력을 누가 갖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아카이빙의 정치입니다.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는 이 위계를 어떻게 바꾸고 있을까요? 클라우드 덕분에 물리적 보존은 쉬워졌습니다. 하지만 접근성 설계는 오히려 더 어려워졌습니다. 수천 장의 사진이 자동으로 백업되지만 정작 필요할 때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첫 번째 층위에 갇힌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 당신의 기록은 어느 층위에 있는가

우리는 매일 기록합니다. 사진을 찍고 메모를 남기고 파일을 저장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록은 첫 번째 층위, 그냥 '어딘가에 있는' 상태에 머뭅니다.


작년에 찍은 사진 수천 장은 클라우드에 존재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검색할 수 있습니까? 3개월 전에 쓴 메모는 앱 어딘가에 있지만 당신은 그 의미를 다시 읽어낼 수 있습니까? 지난해 읽은 책의 하이라이트는 저장되어 있지만 그것이 다른 누군가와 공유되고 있습니까?


힐튼서울의 청사진이 40년 만에 빛을 본 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누군가 캐비넷을 열었고 그 의미를 읽었고 세상에 내보이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층위 상승은 우연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제텔카스텐(Zettelkasten)이나 RAG(Retrieval-Augmented Generation) 같은 체계가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기록을 접근 가능한 상태에서 의미가 활성화된 상태로 끌어올리기 위한 도구입니다. 단순히 저장하는 것을 넘어 연결하고 검색하고 재해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 선택의 문제

그렇다면 모든 기록이 네 번째 층위까지 올라가야 할까요? 모든 개인의 기억이 사회적 기억이 되어야 할까요?


아마도 그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기록은 첫 번째 층위에 조용히 머물러도 괜찮고, 어떤 기록은 나만 찾을 수 있으면 충분하며, 또 어떤 기록은 나만의 의미로 간직되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권입니다. 우리가 어떤 기록을 어느 층위로 끌어올릴 것인지 그 결정권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알고리즘이나 플랫폼이 대신 결정하고 있는가?


당신의 하드디스크에서, 클라우드에서, 서랍 속에서 40년을 기다릴 기록은 무엇입니까? 아니,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활성화시킬 것입니까?


2025년 12월, 힐튼서울 자서전 전시 감상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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