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들고 피 보는 직업은
팔자가 세다던데요?

일터에서 들리는 속마음

by 아름답게





"선생님, 선생님처럼 피 보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팔자가 세다던데요? "




K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왜 내 직업이 갑자기 '팔자'로 연결될까? 농담일까, 진심일까, 아니면 그 중간 어딘가일까.


그런 본인은 매 수업 시간마다 아이들과 함께 날카로운 칼로 재료를 다듬고, 손질이 되지 않은 생물들의 피를 보지 않는가? 잠시 멍했던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를 차분히 바라보니 그녀도 아차 싶었는지


"우리 같이 피 보는 직업은 팔자가 세다고 하더라고요?" 하며 "우리"라는 단어로 본인과 나를 하나로 엮어 본인이 뱉은 말을 무마시키려고 했다.







K는 나랑 전입 동기인데 그녀는 첫 만남부터 나와는 핀트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당시 관리자와의 첫 만남에서 학생들이 도서관과 친해질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다른 학교에서는 어떤 식으로 운영을 하는지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를 해보라는 말에 나는 보상이 충분히 주어지는 "독서기록장"을 방안으로 내놓았는데 이는 문학이나 국어시간을 연계하여 활용한다면 아이들이 도서관이라는 공간과 우선 친해지는데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 진부할 수 있는 방안이지만 학생 개인의 이름을 넣은 노트라던가 수첩을 제공해서 수행평가나 생기부에 연관시켜 책임감을 부여하고 교과목과 연계한 활동을 만들어 반 강제성(?)이라도 도서관 출입을 익숙하게 만든다면 아이들은 도서관과 어느새 친해져 있을 것이다라는 내 말 끝에 뜬금없이 K는 "내가 해봤는데 그거 효과 없더라고요"라며 내 의견에 반대하는 말을 이어 붙였다.



K도 나도 이 학교의 학생들은 처음인데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조금 의아함을 느꼈지만 그 뒤로도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점점 진화되었다.



우선 동기들 사이에서 은근히 나를 따돌림시키려고 굉장히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는데 어느 날은 집으로 가고 있는 나를 불러 세워 동기 모임을 당일 퇴근길에 통보하거나(다른 동기들에게는 내게 전하겠다 해놓고는 늘 그런 식이 었다), 당시 일과시간 전에 내 개인실에서 항상 커피를 내려 작은 티타임을 가졌는데 그곳에 사람이 모이는 게 꼴 보기 싫었는지(항상 본인은 꼭 참석하는 게 포인트..★) 당사자는 들어보지도 못한 관리자가 이 실에 대해 지적했다는 말을 전입 동기들에게 해 이곳에 사람이 모이지 못하게 하는 등 5살짜리 어린아이가 봐도 내 존재가 그녀에겐 너무나 눈에 가시 같은 존재라는 걸 알정도로 유치 찬란(?)한 행동에 속으로는 한심하다 생각하며 무시했지만 가면 갈수록 그녀의 사랑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코로나가 한참 유행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던 무렵이었다.

전 세계가 처음 겪는 바이러스에 방향성이 다양한 뉴스들이 매일매일 쏟아졌는데

서울 어딘가 복도식 아파트에서 바이러스가 화장실 배관을 타고 올라왔다는 뉴스(지금 생각하면 가능성이 굉장히 희박한 이야기지만 우한폐렴이라는 타이틀이 나왔을 무렵이라 공포감이 가중되었던 시절이었다.)를 본 그녀는 대뜸 동기들이 모여있는 공간에서 나를 부르더니


"선생님! 선생님 집도 복도식이죠? 조심하세요 바이러스가 배관을 타고 올라온데요." 라고 말을 했다.




그 말에 도대체 나는 이 사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의미가 무엇일까? 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 근무지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소도시에 사는 그녀가 전원주택에 사나? 하는 결론에 다다라서 해맑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아파트에 안 사시나요? 복도식도 계단식도 배관은 똑같은데요?"


라는 말을 꺼냈고 내 말에 묘하게 얼굴이 일그러지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씩씩대며 자기 실로 돌아갔다. 아마도 내가 복도식 아파트에 산다는 정보가 그녀에겐 나를 무시해도 되는 이유라 생각했던 거 같다.








나랑 전생에 원수였던 사이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럴까?



꽤나 오랫동안 이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또 혼자 화가 났다가 상처받고 그녀로 인해 올라오는 감정조차 내 인생에 아깝고 한심한 일이라며 무시하기를 반복하던 즈음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이 조금씩 식어가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이렇게 끝나나 보다 생각했던 무렵 어느 날 내게 쭈뼛거리며 건네주던 청첩장.



필요에 의한 어색한 미소와 함께 예의 바른 모습으로 주던 청첩장을 받으며 나는 참 여러모로 뻔뻔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잘못한 건 아는지 혼자서가 아닌 본인이 데리고 다니기 편한 어린 선생님과 함께 그리고 두 달 전에 내게 빌려간 우산을 볼모로 우산을 돌려주며..... 저런 성격을 가진 사람도 결혼을 하는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뱃속에 귀한 생명이 자라고 있었단다.



그녀가 조직에서 잠시 사라진 뒤 나는 오랜만의 평온함을 느꼈다.

아마 이 평온함은 그녀가 나에게 이유 없이 보내던 부정적인 주파수가 사라졌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누군가 그랬었다. 뉴스에서 연예인 제대 소식을 들으면 엊그제 군대 간 거 아니냐고 시간이 왜 이리 빠르냐고..... 평온함도 잠시.... 그렇게 나도 그녀의 복직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다.

아마도 마주하기 싫은 사람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문득 2학기 교직원 명단을 정리하다 그녀의 이름을 보고 당시에는 상처받지 않았다 생각했었으나 과거의 알게 모르게 받은 상처와 감정이 올라와 일하기가 진저리칠만큼 싫었던 날도 있었고(그냥 일하기가 싫은데 핑계 댄 걸지도...ㅎㅎ) 복직한 그녀의 앙칼진 웃음소리가 식당에서 여러 사람의 귓가를 때릴 때면 나도 사람이라 인상이 절로 찌푸려질 때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했던 건 다시 복직한 그녀에게 돌아온 건 그녀에게 당한(?) 다른 이들이 그녀에게 보이는 냉소였다.


당시엔 나 말고도 피해자가 있었나 싶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유명했단다. 내가 모르는 자질구레한 사고들도 많이 친 모양인데 나중에 우스갯소리로 관리자가 임용고시에서 인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게 문제라며 그녀의 대한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했다는 것도 들었다.








어느 날 시간이 흐르고 조금 더 단단해진 내가 그 일들에 대해 다시 떠올려보니 희미하게나마 그때의 말과 생각이 조금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과거 그녀가 나를 향해했던 그 말들을 고스란히 내 마음에 담아 상처를 만들었으나 그건 사실 나를 향한 말이라기보단 그녀 자신의 감정인 질투, 비교하는 마음, 열등감들이 투영된 말이라는 것.


겉으로는 조언해 주듯 걱정해 주듯 하며 나의 팔자, 즉 내 삶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게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도 모른 채 속으로는 본인의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한 나를 향하는 은근한 깎아내림과 끊임없이 자신과 비교하고 질투했던 마음들이 들어 있던 것이다.


갑작스럽지만 조금 내 자랑을 해보자면 나는 당시 새로운 학교 근처에 내 힘으로 작은 복도식 아파트를 매입을 한 상황이었고 이게 은은하게 소문이 나 그녀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그녀는 1시간 거리를 출퇴근하던 상황이었기에 뭐가 그녀에게 발작버튼을 눌리게 했던 건지도 어렴풋이 이해를 해보려 온 우주를 총 동원해 노력한다면 이해가 0.1%는 가는 거 같기도..






질투는 종종

걱정을 가장한 내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형태의 '조언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피를 보는 직업을 가진 나라는 사람의 센 팔자를, 마치 바이러스가 우리 아파트 배관만 타고 들어올까 봐 걱정하는 그녀처럼 말이다.


나는 K와의 강렬한 만남 이후로, 누군가의 말에 담긴 감정의 결을 조금씩 더 섬세하게 느껴보려고 애쓰게 되었고 해를 겪으며 꽤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관찰하고 생각하며 말의 중요성에 대해 간절히 깨달았다.

그리하여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불어난 몸(?)만큼 입도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말은 감정의 반사경이다.

상대가 하는 말에는 그 사람의 현재의 심리상태 혹은 열등감을 기반으로 한 불안과 욕망이 숨어 있고,
내가 그 말에 반응하는 방식 또한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구구절절 해명하기도 또 화가 나기도 하고 또는 무시하기도 한다.



이제 지금의 나는 그런 말을 듣더라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일, 나의 감정, 나의 삶에 대해 이제는 스스로 중심을 잡을 수 있을 만큼 제일 나를 명확하게 잘 알고 있으니까.




"누구 말처럼 피를 보는 직업이라 이 센 팔자를 누군가를 돌보고 살피는데 쓸거니 내 팔자는 앞으로 더 좋은 팔자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