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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피시 Jun 03. 2020

1.전원생활 판타지 척살기 '프롤로그'

"누구나 계획은 있다. 두들겨 맞기 전까지는."


누구나 계획은 있다.     


약이 바짝 오른 타이슨(Michael Gerard Mike Tyson 1966~)이 클린치(Clinch) 상태에서 홀리필드(Evander Holyfield 1962~)의 오른쪽 귀때기를 느닷없이, 야무지게 물어뜯었다. 느린 화면으로 보면 사자가 막 사냥한 누(gnu)의 장딴지에 정겹게 어금니를 박는 형국이다. 

그렇다. 타이슨은 계속 머리를 들이박는 홀리필드의 버팅(Butting) 반칙에 화가 났고, 심판에게 읍소해도 말려주지 않자 마우스피스 대신 홀리필드를 물어뜯은 것이다. 회심의 일격을 당한 홀리필드의 귀는 케첩 범벅이 되었다.     



“2점 감점, 한 번 더 물면 실격이야! 마우스피스 끼고 와!”    


홀리필드는 어서 실격패를 선언하라고 스카이콩콩을 탄 캥거루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심판은 링 닥터에게 부상 정도를 묻더니 바로 경기를 재개했다. 전 세계 복싱 팬과 tv 동시 시청자를 고려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더 놀라운 건 다음이었다. 분명 마우스피스를 물고 나온 타이슨이 20초 만에 이번엔 홀리필드의 왼쪽 귀때기 물어뜯기를 시도했다. 거칠고 뜨거운 타이슨의 숨결을 눈치챈 홀리필드가 잽싸게 귀를 빼면서 깨물기 도발은 ‘핥기’에 그치며 라운드는 종료되었다. 

놀랍지 아니한가? 타이슨은 또 물기 위해 대체 언제 마우스피스를 뱉은 것일까! 아무리 화면을 돌려봐도 마우스피스를 뱉는 장면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설마 마우스피스를 삼킨 것인가! 게다가 심판이 한 번만 더 물면 실격패라고 경고했는데도 물어뜯기로 한 저 뱃심이라니! 

해괴하고도 망측한 기행의 결과 타이슨은 당연히 실격 패했다. 자격 정지에 벌금 300만 달러를 물었고, 다음 날 홀리필드에게 미안하다고, 당신이 챔피언이고, 존경한다고 머리를 숙였다. ‘핵주먹’이란 별명은 자연스럽게 ‘핵이빨’로 강등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타이슨은 “홀리필드의 귀는 더럽게 맛이 없었다.”라고 우스개 충격 고백까지 했다.     

 "누구나 계획은 있다. 두들겨 맞기 전까지는.”

    

그런 타이슨이 아직 핵주먹일 때 저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무리 멋진 전략을 세워 링에 올라와도 자기에게 몇 대 맞으면 곤죽이 돼 나가떨어질 거라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나는 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참 좋았다.

꿈과 현실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걸 일깨우는 데 그보다 더 좋은 표현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오후 햇볕이 사선으로 낙하하는 소리, 바람이 솔숲을 관통하는 소리, 새들이 이리저리 날며 포물선 그리는 소리, 늦은 겨울밤 흰 눈이 발목까지 푹푹 쌓이는 소리, 고라니가 근처까지 내려와 사철 울어대는 소리가 정겨운 한적한 곳이다. 계절에 맞춰 텃밭에 상추와 배추와 양파를 심고, 가끔 여행 관련 강의를 다니고, 조앤 바에즈의 음악을 듣고, 날이 푹하면 지인들을 모셔다 별과 달을 안주삼아 술을 마셨다.   


 

‘뉴질랜드 관통기(2019)’ 에필로그에 소개한 내 전원생활의 일부다. 누구나 떠올리는 진부하도록 전형적인 인서트 장면. 새소리에 저절로 눈 뜨는 복된 아침, 창으로 쏟아지는 온통 파란 하늘과 눈부신 신록, 사선으로 비쳐 드는 지중해풍 햇살과 숲 우듬지를 넘나드는 바람의 보드라운 질감, 진한 아카시 향에 곁들이는 우아한 쇼스타코비치와 갓 볶아 낸 커피 한 잔의 고소함. 어쩌다 주말이면 찾아주는 지인들의 ‘멋지다, 좋겠다, 부럽다’는 달달한 립 서비스까지. 전원생활은 언제나 옳기만 한 절대 행복인 줄 알았다.   

  

두들겨 맞기 전까지는.      

하지만, 전원생활의 실상은 타이슨의 저 명언대로다. 누구나 계획은 있다. 두들겨 맞기 전까지는. 아무리 오래 꿈꾸고 계획했더라도 시골에 들어가 살면 정신이 번쩍 드는 여러 가지 아롱사태를 겪게 마련이다. 당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수많은 복병들. 별 것 아니라고 간과하거나 ‘닥치면 해결되겠지’ 장담하기 좋게 사소하다가 1년도 채 안 돼 도시로 꽁지 빠지게 내빼는 수모를 안겨주는 뒤끝 작렬들.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자. 다음의 상황에서 2m쯤 솟아오르며 돌고래 표 두성 포효를 내지르는 대신 은은한 아재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전원생활 입문 1차 서류전형 통과다.

    

1. 마당에 앉아 오후 햇살을 즐기는데 눈이 착해 보이는 쥐 한 마리가 나를 향해 직진한다. 나는 일체의 움직임을 멈추고 싱긋 웃으며 쥐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끝까지 지켜볼 수 있다. 설령 쥐가 물더라도.   


2. 다리가 여러 개 달린 동물(지네, 돈벌레, 거미, 그리마 등) 또는 처음 보는 곤충들이 부엌 벽을 타고 있다. 휴지를 뽑아 감싼 뒤 밖에 데려다 방생할 수 있다.    


3. 구절초를 뜯으러 뒤꼍 야산에 갔더니 뱀 한 마리가 스윽 발밑을 스쳐가거나 멧돼지나 고라니가 놀라 후다닥 내뺀다. ‘이것이 야생이지!’라며 뿌듯해할 수 있다.    


4. 일면식도 없는 익명의 이웃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트집 잡아 면사무소에 ‘악성민원’을 끊임없이 넣는다. 요구 조건이나 특별한 이유도 없다. 나는 완성도 높은 궁극의 인격 수양체이므로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다.     


5.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풀을 뽑을 수 있다. 다음 날에도 풀을 뽑을 수 있다. 휴가를 내고 사흘 연속 풀을 뽑을 수 있다.    


고난의 보자기를 벗기자.

짓궂기도 하시지. 하느님은 선물을 줄 때 굳이 번거롭게 고난의 보자기에 싸서 주신다고 한다. 시골 생활 3년 차를 맞아 분통이 터져 눈물 쏟을 만한 일도 겪었고, 한 때 집을 불사르거나 인명을 살상하고 도시로 도망갈까 하는 궁리도 했다. 도시에서 사람에 치여 시골로 왔더니 시골 논두렁 악당들에게 또 치인다는 게 서글프기도 했고.

그런데도 나는 시골살이를 계속하고 있다. 이유는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한 절대 행복과 절대 고요와 절대 충만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몇몇 시한폭탄을 안고 있기는 해도 ‘내 남은 생에 지금보다 더 높은 차원의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만큼 융숭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적응만 잘한다면 손 뻗어 잡을 수 있는 행복, 이 공간은 그곳으로 안내하는 소소한 개밥바라기별 같은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뽑아도 뽑아도 미친 듯이 자라나는 풀에 질려 널브러져 있다가 벌에 쏘인 어느 날 내 속에서 사골처럼 진하게 우러난 노래 한곡을 BGM으로 소개하며 막칭 ‘전원생활 판타지 척살기’ 프롤로그를 대신한다.      


<What A Wonder '풀' World> 

(얼마나 놀라운 풀 천지인가) - rouis Arm strong(누이 팔뚝 굵어)      

I see weeds of green, all bees too 

푸른 잡풀과 온갖 벌들을 보네 

I see them grow for me and you, 

풀들은 무럭무럭 자라네 나와 그대를 위해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 풀 world" 

이런 생각을 하네, '젠장! 얼마나 놀라운 풀 천지인가'

I see skies of yellow, and tears of blood, 

하늘이 노랗고 피눈물을 흘리네

The hot sun curses the day, and the dark say go to work  

낮엔 뜨거운 태양이 저주하고, 밤에도 일이나 하라고 말하네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 풀 world" 

이런 생각을 하네, '젠장! 얼마나 놀라운 풀 천지인가'

The colors of the concern so pretty in my face. 

내 얼굴 가득 예쁘게 수놓은 걱정들

Are also on the faces of people looking me 

나를 보러 온 지인들의 얼굴에도 걱정 가득이네

I see friends shaking hands saying "What the hell are you doing?" 

'도대체 뭐 하는 거냐?'라고 말하며 악수하는 지인들은 

They're really saying "you crazy" 

사실은 '이 미친놈아'라고 말하는 것이라네

I hear bees crying 

벌들이 우는 소릴 듣다가 

I watch them shot me 

나를 쏘는 걸 보네 

They'll swell up much more than I'll ever known.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부어오르겠지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 풀 world" 

이런 생각을 하네, '젠장 얼마나 놀라운 풀 천지인가'

Yeah,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 풀 world" 

이런 생각을 하네, '젠장! 얼마나 놀라운 풀 천지인가'

O.M.G.   

  

PS. 화해의 삶    

20여 년 전 귀 물어뜯기 신공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타이슨은 나중에 홀리필드와 화해했다. 은퇴한 홀리필드는 매운 양념 소스 사업을 했는데, 소스 광고에 타이슨이 우정 출연하기도 했다. 타이슨은 광고에서 작고 앙증맞은 선물 상자를 들고 홀리필드의 집을 찾아가 초인종을 누른다. 문을 연 홀리필드가 자못 놀라운 표정을 짓자 타이슨이 들고 있던 상자를 내밀며 쑥스럽게 말한다.   


“자, 네 귀를 가져왔어.”

“내 귀잖아!”

“내 입안에 남아있던 걸 챙겨뒀었어.”

“고마워.”    


둘은 뜨겁게 포옹하며 마음의 앙금을 말끔히 씻어낸다. 나는 그 장면에서 타이슨이 다시 한번 홀리필드의 귓불을 탐하며 입맛을 다시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쉽게 그런 장면은 삽입되지 않았다. 대신 광고의 카피가 수준급이다.      


“이 소스와 함께라면 홀리필드의 귀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겠는걸!” 


그렇다. 귀를 물어뜯고 뜯긴 앙숙도 화해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다. 시골살이가 처음에는 미친 듯이 물어뜯어 당황하겠지만, 세월이 흐르면 엄마의 양수처럼 폭 감싸 안기 마련이다. 홀리필드의 귀를 노리는 타이슨의 마음가짐으로 고난의 보자기를 열심히 벗겨나가자. 그 수고로운 노고 끝에 달달한 행복이 매달려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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