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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Jan 02. 2020

하얀 드레스

그리고 2020년





내 옷장을 열면 깜짝 놀랄 정도로 까만 옷이 많다. 원피스는 긴 팔에 소매 끝부분 프릴이 달린 것부터, 어깨에 작고 귀여운 트임이 있는 반팔, 소매 없이 단정하게 퍼지는 것까지 종류도 다양하고 길이도 제각각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니트 재질도, 도톰한 봄가을 원피스도, 하늘하늘한 한여름 원피스도 전부 까만색이다. 카디건 역시 허벅지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것, 허리까지 딱 맞춤인 것, 그보다 짧고 귀엽게 레이스 달린 것까지 종류도 다양한데 전부 까만색이다. 티셔츠도 호랑이가 크게 그려진 것부터 화려한 장미 두 송이가 있는 것 등 기본색은 역시, 전부 까만색이다. 한동안 머리가 노란색이었고, 그래서 까만색이 꽤 잘 어울렸고, 그래서 줄기차게 까만색만 입었다. 장을 보러 갈 때도, 일하러 갈 때도, 심지어 잠잘 때도 나는 늘 까만 여자였다.      



그런데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도 일어나는 법. 어느 날 갑자기 당연한 듯 까만 옷을 입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새로 염색한 머리에 까만색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닌가! 파랗게 염색했던 머리가 점점 물이 빠져 회색이 되어가고 있었고 그 머리에 까만 옷을 입은 거울 속 내 모습은, 뭐랄까, 화창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칙칙했다.      



시크와 세련의 대명사였던 내 까만 옷들이 어느 순간 칙칙하고 어두운 색이 되어버렸다. 허겁지겁 까만 옷을 벗고 옷장을 뒤졌다. 겨우 회색을 찾아 입었는데, 어라? 회색은 오랫동안 내게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썩 괜찮았다. 까만색 말고도 어울리는 색을 찾아 어쨌든 다행이었으나, 이제 이 많은 까만 옷들을 전부 어쩐다! 머리 색이 바뀌었다고 나의 까만색이 이제 남의 색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산만한 정신으로 종종거리며 쇼핑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옷가게를 휘젓고 다니는 중이었다. 옷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걸로만 해결할 수 있는 별 것 아닌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차분히 구경할 시간도 없고 별로 옷을 사고 싶은 것도 아닌데 옷을 찾아 정신없이 헤매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필요한 옷을 생각해 두었다가 사러 가면, 내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옷을 꼼꼼히 골라 입어보는데, 그러다 보니 늘 비슷한 옷들만 사 들고 오게 된다. 그런데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비상 상황에서는 나와 옷의 궁합 따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마네킹에게만 예쁜 옷, 내가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옷, 앞으로도 전혀 입을 것 같지 않은 옷들만 잔뜩 들고 탈의실로 가 밀린 설거지 해치우듯 하나씩 입어본다.      



오, 세상에 이런 옷도 있구나.

이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 끈은 어디다 묶으라는 거지?      



이렇게 중얼거리며 자동인형처럼 정신없이 옷을 갈아입는다. 어차피 사지 않을 거, 지갑 가벼워질 걱정도 없이 그렇게 한바탕 태풍을 지나 보내면, 그제야 후,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좀 차린다.      



그렇게 정신없던 어느 날, 그렇게 나와 함께 탈의실까지 오게 된 새하얀 드레스가 한 벌 있었다. 잔뜩 들고 온 옷을 탈의실 옷걸이에 대충 걸어 놓고 우선 한숨부터 쉬었다. 피곤할 때는 그것도 일이다. 입은 옷을 다 벗고, 새 옷을 입고, 거울을 보고, 너무 어울리지 않는 내 모습에 놀라 좌절하고,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것도 딱히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입으로는 이게 무슨 짓인가 중얼거리면서도 손과 발이 착착 움직여, 결국 어울리지도 않는 이상한 옷을 입은 여러 버전의 내가 자꾸 거울 속에서 나를 놀라게 한다. 그러다 그날은 진짜 깜짝 놀랐다.  


어라, 이 옷이 잘 어울리다니! 머리 색이 변하니 흰색도 괜찮네?



문제의 그 새하얀 드레스. 무릎보다 살짝 더 내려오는 길이에 (평소에는 다리 굵어 보인다고 거의 입지 않던 길이다!) 소매는 없고 목과 등은 브이로 시원하게 파여 있는 까슬까슬한 여름 드레스였다. 하지만 허리의 고무줄과 얇은 끈이 문제! 안 그래도 퉁퉁한 허리가 더 두꺼워 보이는 디자인, 누가 입어도 실제보다 훨씬 커 (뚱뚱해) 보이는 디자인, 빼빼 마른 아가씨들만 겨우 소화할 것 같은 디자인이었는데, 그 옷을 입은 거울 속 나도 썩 나쁘지 않았다! (글로는 그 모습을 보여줄 수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나뿐일 테니까!)      



가격표를 보았다. 엇, 평소에 옷 한 벌에 지출하는 금액보다 높았다. 아! 이건 나를 위해 태어난 옷이야!라는 생각이 들어도 몇 번을 고민했을 가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새로운 내 모습에 반했다. 무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나라니! 아무 장식도 무늬도 없는 순백의 드레스라니! 충분히 기념할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니 그만큼의 돈을 지출할 만하다고 속으로 외치며 나는 걸음도 당당하게 그 드레스를 사서 나왔다.      



집에 돌아와 옷장을 열어보니 역시 칙칙해 보이는 까만 옷들만 잔뜩 걸려 있었다. 까만 옷들 사이에 걸린 새하얀 드레스만 저 홀로 은은히 빛났다. 정신은 돌아왔고, 나는 내가 과연 무엇을 사 온 것인가 돌이켜보며, 다짐, 또 다짐했다.


자, 저 옷을 언제 입을까. 과연 입을까. 암, 입어야지. 입을 거야. 곧 입을 거라고.     

 

그리고 세상에는 까만색 말고 더 많은 색이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떠올렸다. 그 색들이 조금 더 내 옷장을 침범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옷장이 알록달록해지면 왠지 별 것 없는 내 일상도 다채로워지지 않을까 싶어서.

옷장을 뒤져보니 파란색도 한 벌 쯤 있었고, 주황색도 한두 벌은 있었다. 오래 입지 않던 그 옷들을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조금 더 다양한 색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변화는 언제나 좋으니까. 내가 새로워지는 변화라면 더더욱 좋으니까. 이제 삶을 뒤흔드는 커다란 변화는 자주 오지 않을 테니, 그런 소소하고 자잘한 변화가 더욱 반갑다.      







몇 주 후, 새로 생긴 옷가게에 들어간 나는 까만 옷들을 지나쳐 하얀 옷들만 걸린 옷걸이에서 또 원피스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때 산 하얀 드레스도 아직 한 번밖에 안 입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면서 무심히 그곳을 나왔다. 하얀 드레스도 어울리는 사람은 되었지만, 아직 하얀 드레스를 즐겨 입는 사람은 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조금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새로운 내가 조금 더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을 두기로 했다.      



내 까만 옷들은 여전히 옷장 안에 있다. 애써 잊고 있던 흰색의 팽창 법칙을 다시금 깨닫고 화들짝 놀라게 될 어느 날 반드시 필요할 테니 우선은 두기로 했다. 하지만 두 번째로 흰 드레스를 사게 되는 날 쯤에는 까만 옷들도 많이 구석 상자에 담겨 있을지 모르겠다. 새 옷을 걸 옷걸이가 부족해질 때마다 가을 나뭇잎 떨어지듯 하나둘 자리를 내어주겠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옷들도 그 자리에서 조금씩 낡아가겠지. 취향이 돌고 돌아 다시 까만 옷들을 찾게 되는 날 쯤에는 옷걸이에서 사라락 바스러질지도 모르겠다. 이제  쓸모를 잃어버린  세상의 모든 2019년도 달력처럼.      



새해에는 하얀 드레스를 조금 더 많이 입어야겠다. 그러다 한두 벌 쯤 더 사겠지. 그렇게 조금씩 변해야지. 옷장도 나도. 초록 드레스를 입은 나, 아니면 보라색 머리에 형광 핫팬츠를 입은 나, 그것도 아니라면 한여름 열대의 나라에서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고 다니는 내가 되어보는 것도, 2020이라는 이 기괴한 숫자의 새해에는 왠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매번 잊고 싶어 일부러 잊어버리는 내 기괴한 나이도 어쩐지 무심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고.      



2020 그대, 우리 한번 잘해보자!    









Photo by boram ki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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