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 Aug 18. 2020

몸과 마음의 티격태격

단정히 걷기


꿈은 컸지만, 현실은 초라한 채 마흔이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마흔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마흔에는 더 멋진 사람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스물도 아니고 서른도 아니고 마흔!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마흔이 되어 버렸다니!     


그래서 앓았다. 마흔의 사춘기. 


마흔의 사춘기는, 질풍노도는 아니었지만, 무기력했다.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는 게 진짜 사춘기라면, 마흔의 사춘기는 주체할 에너지도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무기력한 시절을 보내며 괜찮아지길 기다렸다. 

어두운 밤, 버스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있듯, 

나도 모르는 무언가를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시절을 보냈다.      


과연 무엇을 기다렸을까. 

그래도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 

이번 생은 망했다가 아니라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길 기다렸다. 

다시 말해, 마음이 제대로 작동하길 기다렸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좀 지겨워. 왜 맨날 내가 먼저 앞장서야 해? 몸을 설득해서 일찍 일어나게 만드는 거, 공부하고 일 하라고 격려하는 거, 네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 주는 거.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나도 이제 좀 쉬고 싶거든?


틀린 말이 없었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그래서 나는 마음에게 쉴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래, 그동안 앞장서느라 애썼어. 이제 좀 쉬렴. 항상 먼저 깃발 들고 나서지 않아도 돼. 가끔은 그냥 따라가기만 해도 돼.   



그리고 몸에게 말했다. 

야, 몸. 이제 네 차례인 것 같아. 마음이 뭐라고 했는지 들었지? 왜 네 차례냐고? 그동안 쫄래쫄래 따라다녔으니까, 이제 너도 앞장서 볼 때도 되었잖아. 그렇지?  



몸은 원래 단순한 친구라, 금방 설득이 되었다.      

그래서, 요가를 했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요가를 해야 하는 이유, 요가를 하면 좋은 점,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의 긍정적인 효과 등을 마음이 전부 정리하고 나서야 몸이 그걸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으니,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몸부터 움직였다. 

오래도 아니고 딱 십오 분. 그러고 나니 아주 쪼금 괜찮아졌다. 곧 다시 우울해졌지만.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십오 분. 역시 아주 쪼끔 괜찮아졌다. 

조금 더 오래 괜찮았다. 책상에 앉아 책도 보고 글도 쓸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 멋진 글을 발견했다. 



북튜버 김겨울의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라는 책에서였다.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 끌려갔던 임레 케르테스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 <운명>을 읽고 그녀가 쓴 글이다.      


“우리는 인생의 그 어떤 부분도 피해 갈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영화가 아니다. 기승전결을 갖춘 소설이 아니다. 잘 편집되고 이야기로 조직된 매끈한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기어이 1초, 1초를 온몸으로 통과해야 한다. 가장 행복한 1초든, 가장 고통스러운 1초든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시간은 같다. 그것은 때로 지루하고 자주 고생스럽다. 그러나 그 어떤 1초도 다른 이에게 의탁할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과거의 1초도 미래의 1초도 나의 몫이며, 나의 몫이어야만 한다. 그 온몸으로 밀어내는 시간이 층층이 쌓여 ‘나’라는 인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그것 외에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없다. 그 과정에 고통스러운 상처가 있을지언정 없었던 셈 치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는 없다. 그 상처를 가진 내가 여기 있다. 이것이 죄르지가 알아낸 삶의 본질이다.”     


온몸으로 통과해야 한다고! 

삶은 마음이 아니라 몸으로, 그것도 온몸으로 통과해야 한다고!     


내 앞에 놓인 1초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침대와 한 몸이 된 우울한 1초를 보낼 수도 있고, 요가 매트와 한 몸이 되어 땀 흘리는 1초를 보낼 수도 있다. 

선택은 오직 나의 몫이다. 

어떻게 보내도 1초는 지나간다. 

오직 1초씩 지나간다. 

그렇게 1초씩 살아내야 한다. 

아우슈비츠에서의 1초를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그도 나도 온몸으로 1초를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자명하다.     



다음은 소설의 주인공 죄르지의 말이다. 


“나도 주어진 운명을 겪어냈다. 비록 그것이 나의 운명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것을 버텨냈다.... 나는 계속 설명했다. 새로운 삶이란 없고, 언제나 예전의 삶을 계속 이어갈 뿐이라고. 나는 누구도 대신 걸어가 줄 수 없는 나의 길을 걸었다. 그것도 단정한 태도로 걸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다.”     


단정한 태도로 걸었다니. 


나는 곧장 그 말과 사랑에 빠졌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난 그가, 그 모진 고통과 트라우마를 안고서도 단정하게 걸었다니! 

벼락처럼 자신에게 닥쳐버린 삶을 꼿꼿하게, 태연하게 헤쳐나가며 단정히 걸었다니.      


마음이 힘들 때, 아플 때, 쉬고 싶을 때, 더더욱 단정한 걸음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마음은 돌진하거나 방황하고, 즐거워하거나 슬퍼할 수 있지만, 

단정히 걷는 것이야말로 오직 몸만 할 수 있는 일이며 

그 단정한 걸음이 마음을 위로하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은 말한다.

걱정하지 마. 괜찮아. 힘들면 혼자 이겨내려 하지 말고 내 리듬을 따라와 봐. 금방 괜찮아질 거야. 준비되면 올라타. 나는 계속 단정히 걷고 있을 테니.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은 완전히 다를 수 있지만 (사실 그게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가!) 

어제의 몸과 오늘의 몸은 크게 다를 수 없다. 

그리고 그 연결성이, 그 다르지 않음이 삶의 단단한 추가 되어 준다. 

어제의 몸이 오늘의 몸으로 이어지고 내일의 몸이 되면서 삶은 지속된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촘촘히 엮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었다.      



몸이 앞장서기 시작한 후, 

기다리던 생각이 어느 순간 와 있었다. 마음은 어느새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도 괜찮다. 이번 생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

어느새 매일 요가는 한 달이 넘었고 오십 일이 되었다. 

나의 단정한 걸음이 되어 주었다. 당분간은 더 몸을 앞세워 살아볼 참이다. 

단정히 걸으면서.      


그래, 몸을 움직이겠다는 말을 참 길게도 한다, 그치?      

매거진의 이전글 하얀 드레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