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 Sep 09. 2020

방황하는 청춘의 집




  대학에 합격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오직 추첨으로만 선발하는 기숙사 당첨 소식을 또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비싼 등록금에 하숙비까지 얹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기에 2년 만이라도 기숙사에 살 수 있길 원했다. 다행히 덜컥 당첨되어 2년을 살았다. (예외는 있었지만 모든 학생이 2년밖에 살 수 없는 규정이 있었다)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 머릿속으로만 그려보던 감옥의 느낌과 너무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신발 벗는 곳은 한 사람이 서 있으면 더는 자리가 없어서 다음 사람은 문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철제 침대가 양쪽으로 두 개씩 나란히 붙어있었고 아주 귀엽다고밖에 할 수 없는 책상에 침대 머리맡에 하나씩 붙어있으면, 겨우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만 남았다. 방안에서의 모든 생활은 침대 위, 아니면 책상 의자 위에서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2년 후, 어쩔 수 없이 학교 앞에 하숙방을 얻었다.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왁자지껄한 기숙사를 벗어나는 것도 좋았고, 통금이 없어진다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좋았다. 깔끔한 원룸은 비쌌다. 먼지 한 톨 없는 계단과 얼룩 하나 없는 벽지 같은 건 내게 사치였다. 학교에서 가까운 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한참을 걸어 내려와 찻길을 건너고, 또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 마지막으로 야트막한 오르막길까지 올라가야 있는 허름한 하숙방에 짐을 풀었다. 기숙사에서 4명이 함께 쓰던 방과 비슷한 크기의 방을 나 혼자 쓰게 되었다. 얼마 없는 짐을 띄엄띄엄 부려놓고 나니 방이 휑했다. 그렇게 몇 달을 살고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갔다. 방학이 끝날 무렵, 내 방은 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었고, 올라오기 전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누군가 내 방에 쳐들어와 살고 있는 꿈이었다.      


  버스를 오래 타고 서울에 도착해, 전철을 타고 또 오래 걸어 그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갈 때였다. 다시 꿈 생각이 났고 왠지 예감이 안 좋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복도 끝, 현관문과 마주 보고 있는 내 방 문틈으로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조심히 다가가 문을 열었다. 내 또래 여학생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누가 더 놀랐을까. 내가 이불을 깔고 자던 아랫목에는 싱글 침대가 당당히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옆으로 어엿한 책상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누구세요?    

 


네? 이 방에 하숙하는 학생인데요?     



제 방인데요?     



아, 주인아주머니가 이 방 너무 큰데 혼자 받기는 아깝다고 해서요. 하숙비는 줄어들 거예요. 괜찮지 않아요?     



  아니, 이 사람들이! 아무리 하숙방이라도 주인 허락 없이 그렇게 자기들끼리 결정하고 짐을 풀어도 된단 말인가! 기가 막혔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아랫목에서 쫓겨나 방문 앞에 이불을 깔고 그 옆에 앉은뱅이책상을 놓아야 했다. 기분이 더러웠다. 주인아줌마 방으로 쳐들어가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내 전화번호 알지 않았냐고, 최소한 전화로 의견은 물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한바탕 깽판을 치고 싶었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얼굴을 최대한 구긴 채 나 지금 심기가 몹시 안 좋거든요, 라는 메시지만 전하며 그 방 윗목에 피로한 몸을 누였다. 침대 위에서 자는 애 옆에서 문 앞에 이불을 깔고.     


  그랬는데, 그 친구가 너무 멋진 친구여서 둘은 절친이 되고 졸업 후로도 십 년 동안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다면, 또 그렇게 나쁜 결론은 아니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법대를 다닌다는 그 깍쟁이와 나는 술 한잔 제대로 마시지 않고 6개월을 보냈다. 그나마 그 하숙집 아줌마가 학교 근처에 더 큰 집을 얻어 새로 하숙을 칠 건데, 그때는 작은 방이나마 혼자 쓰게 해 주겠다는 조건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짐을 챙겨 나와 버렸을 것이다. 물론 갈 데도 없었지만. 그 깍쟁이 이름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새침했던 표정만은 아직도 기억난다. 지금은 어디서 판사 봉을 휘두르고 있을지, 누구를 변호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처음 마주한 순간, 그렇게 당당할 입장은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세월과 함께 깨우쳤길 바란다.     


  연세에 비해 키가 몹시 크고 한 체격 하셨던 하숙집 아줌마는 음식 솜씨도 전혀 없고, 깔끔하지도 않았다. 뭘 좀 차려 먹으려고 부엌으로 가면 바닥은 기름때로 끈적끈적했고, 뒤늦게 사라락 몸을 숨기는 바퀴벌레 소리에 밥맛이 뚝 떨어지곤 했다. 그건 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을 끄고 누우면 온갖 벌레들이 주위를 기어 다니는 끔찍한 느낌 때문에 불도 끄고 자지 못했다. 창이 없어 불을 켜놓아도 어두컴컴한 방에 피곤한 몸으로 들어와 자지도 못하고 밤새 지뢰 찾기를 하다가 아침에 겨우 잠깐 눈을 붙였다. 늘 피곤했다.

그 기억하기 싫은 하숙집의 추억 중에도 달콤한 게 있었으니, 날 집에 데려다주던 남자 사람 친구가 대문 앞에서 날 껴안으며 우리는 달콤한 연애를 시작했다.      



  계약이 끝나자마자 빠져나와 구한 나의 다음 집은 고시원이었다. 대학 졸업 마지막 1년을 남겨놓고 휴학이라는 패를 던졌으니 최대한 집값을 줄여야 했다. 침대와 책상 하나가 전부인 방이었지만 작은 창문이 빼꼼 열리는 방이었다. 그 창문을 위해 몇만 원을 더 지불했다. 누가 쳐들어올 수 없을 만큼 방이 작아서 좋았다. 화장실은 없었기에 복도 끝 계단참에 있는 공용 화장실로 세면도구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가야 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씻을 때마다 지독하게 추웠다. 문이 잠기지 않을까 봐, 나는 잠겄는데 혹시 밖에서 열릴까 봐 겁을 먹고 후닥닥 씻던 날들이었다. 건물 지하에는 고시원 주인아저씨가 운영하는 바 bar가 있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는 못했다. 나이 지긋한 중년 커플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매일, 학교에서 더 멀어진 고시원으로 (휴학했어도 학교에 갈 일은 많았다) 컴컴한 어둠을 뚜벅뚜벅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와중에도 남자 친구는 주말 아침 일찍부터 고시원 앞으로 와 나를 기다리곤 했다. 계란 프라이까지 나오는 근처 백반집에서 아침을 먹고 온종일 데이트를 했다.      



  지저분한 하숙집만큼 마음도 초라했던 청춘이었고, 

  따뜻했던 남자 친구의 품만큼 마음도 설레었던 청춘이었다. 

  집이랄 것도 없는, 초라한 공간을 전전하던 청춘의 시절이었다. 







Photo by Markus Winkler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몸과 마음의 티격태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