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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Sep 11. 2020

내 표정이 어때서

무표정이 어때서


“있잖아. 우리 새터 때, 애들이 너 조폭 딸인 줄 알았대.”


대망의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밥을 함께 먹는 친구들이 꾸려진 후 그중 하나가 했던 말이다. 


“어머, 왜?”


“네가 웃지도 않고 말도 안 하고 심각한 표정만 짓고 있으니까. 그리고 등치도 좀 있었고.”      


아무리 그래도 조폭 딸이라니. 똘마니들한테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 말도 표정도 없이 근엄하게 앉아 있는 뭐 그런 걸 상상한 거야? 나는 그저 지방에서 갓 상경해 화려한 서울 아이들 틈에 기가 죽어 있었을 뿐이라고!      



이십여 년 후,      


“자기야. 이 동네에서 자기 별명이 뭔 줄 알아?”


“뭔데?”


“올드보이.”


“왜?” 


“자기 처음 봤는데 인사도 안 하고 표정도 무섭고 그래서.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대. 늘 심각하기만 하고.”

      

아무리 그래도 올드보이라니. 영화는 안 봤지만, 분위기는 알겠네.      



이십 년이 넘도록 그렇게 한결같이 살았다. 진지하게 살다 보니 우울해진 건지, 원래 우울해서 늘 진지해 보였던 건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한결같았다.      


화난 것 같아요. 

왜 이리 심각해? 

어디 아파? 

피곤해?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기본 표정인데 왜들 그러시는지.     



일본 최고의 심리상담가라는 고코로야 진토스케는 <이제부터 민폐 좀 끼치고 살겠습니다>라는 책에서 말했다.      


흔히 언제나 웃는 얼굴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늘 그렇게 웃는 것이 이상하다고. 혼자서 반신욕을 할 때 뜨끈해서 기분 좋지만 큰 소리로 웃지는 않으며,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아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으면 무서워진다고. 혼자 있을 때도 싱글벙글 웃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그냥 평범하게 행동하면 된다고. 우리의 기본 표정은 웃는 얼굴이 아니라 웃지 않는 ‘무표정’이라고! 그게 당연하다고!      



무릎을 쳤다! 그래! 그게 당연하다. 근데 왜 자꾸 웃으라고 하는 거야? 무표정이 기본 표정이라잖아요! 내가 잘하고 있는 거였어. 괜히 내 표정을 보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이 문제였지 내가 문제가 아니었다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사람들 틈에서 어색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그런 표정을 사용했다. 누구나 각자 다른 방법으로 새내기 새로 배움터, 낯선 이들과 첫 만남의 어색함을 숨긴다.


‘내가 이 아이들하고 4년 동안 같이 지내야 한단 말이지?’라고 긴장을 하거나,

‘한국 사람도 별로 없는 이곳에서 한 명을 만나도 잘 만나야 할 텐데 걱정이군!’이라고 고민하다 보면 


처음부터 편할 수가 없다. 과하게 첫인상을 신경 쓰게 된다. 그럴수록 어색해지고 불편해지면서 나는 조폭의 딸처럼 입을 다물거나 올드보이처럼 심각하고 무서운 얼굴이 되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일부러 목소리를 한 옥타브 높이고 평소에는 하지도 않을 말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또 어떤 이들은 겁에 잔뜩 질려 휴대전화만 바라보며 그 순간에서 달아난다. 나 역시 어색했던 많은 상황을 그렇게 무표정으로 헤쳐나가곤 했다. 첫 만남이 어려워 그렇게 하다 보니, 그게 익숙해져 계속 그렇게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도 여행할 때는 다른 사람이 된다. 여행지에서의 인연은 대부분 첫 만남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으니 상대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을 덜 하게 된다. 첫인상이 어떻게 남을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나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든 금방 헤어져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뭐. 그래서 처음부터 바보처럼 웃어도, 실없는 소리만 늘어놓게 되어도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평생 여행만 하며 살 수는 없는 법. 일상으로 돌아오면 나는 다시 무표정을 장착했고, 그래서 친구를 사귀는 데 몹시 오래 걸리는 사람이 되었다. 아주 잘 맞는 사람이 아니면 쉽게 친구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아주 잘 맞는 사람은 정말 귀했다.      


그런데 그렇게 이십 년을 살았더니, 이제 너무 심심한 것이다. 친구는 못 사귀고 그런 별명이나 얻으면서. 올드보이라니, 세상에. 그래서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던, 그 기본이라던 무표정을 이제 좀 그만하고 싶어 졌다. 외로워서.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막 웃어? 그래도 무표정보다는 웃는 게 좋겠지? 실없는 바보나 수다쟁이 캐릭터도 괜찮겠다. 엉뚱한 말로 분위기 좀 깨뜨리면 어떤가. 첫인상이 관계를 쥐고 흔드는 것도 아닌데 뭐. 관계란 살아있는 생물처럼 늘 꿈틀대며 시시때때로 변하니까. 눈썰미 좋은 칭찬으로, 따뜻한 말 한마디로 언제든 다시 살아날 수 있으니까. 그렇겠지? 정말 그런 거겠지? 아, 이렇게 또 긴장하면, 보나 마나 또 후딱 무표정의 가면을 뒤집어쓸 것만 같아.


아 몰라. 되면 좋지만 안 되면 말고. 친구 없이 나랑만 잘살아도 성공한 인생이야, 암. 그렇고말고.           









Photo by Isabell Wint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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